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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드뷔시가 1890년 작곡에 착수했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의 세 번째 곡입니다.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듯합니다.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연주하는 곡이 바로

<달빛>입니다.

또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판타지풍의 영화 <트와일라잇>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됐습니다.

베트남의 트란 안 홍 감독이 1994년 만든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도 이 곡이 인상깊게 나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드뷔시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인상주의'라는 네 글자입니다.

인상주의는 애초에 회화에서 시작된 흐름인데 그것이 음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

'인상주의 음악'(Impressionist Music)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바로 드뷔시에서부터 입니다.

회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음악에서의 인상주의도 자연에서 받은 순간적인 느낌을 음악으로 구현하려는

의지와 태도를 일컫습니다.

청각 뿐 아니라 시각과 촉각 후각 같은 공감각적 효과를 추구한 것도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의 시간성 뿐 아니라 공간성이 매우 중요해졌다는 뜻입니다.

음악에서의 시간성은 주로 선율과 조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반면에 공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화성'과 '음색'이 중요해집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붓으로 화면을 툭툭 터치해 미묘하고 몽환적인 효과를 얻어낸던 것처럼

드뷔시의 음악에서도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점묘적 수법'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물론 드뷔시 본인은 '인상주의'라는 말을 쓴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음악을 그렇게 부르는 것조차 못마땅해 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오늘날 인상주의 화가들로 불리는 클로드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고갱, 폴 세잔 등도

비슷했습니다.

그들도 자신의 작품을 인상주의라고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을 등장시킨 것은 평론가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게다가 드뷔시는 애초에 바그너 숭배자였습니다.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했던 1872년부터 십 수 년 동안 드뷔시는 바그너를 자신의 음악적 모델로

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드뷔시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언젠가 유명해질 날을 꿈꾸던 당시의 음악학도들도 너나없이 바그너를 동경했습니다.

한마디로 바그너풍은 당시의 '대세'였습니다.

낭만주의의 정점을 찍었던 거대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에 너도나도 마음을 뺏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드뷔시는 1888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독일 바이로이트를 방문한 이후, 바그너의 웅변적인

음악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은 바그너와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자아의 발견'을 이뤘던 것입니다.

이 자각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드뷔시적인 음악의 출발일 뿐 아니라, 프랑스적 근대음악(모더니즘)도 결국 그 지점에서 발을 내디뎠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결단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당시 드뷔시가 몸담았던 '화요회'의 젊은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기존의 미학을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집에서 화요일마다 모였던 그 예술가들은 화가로는 고갱, 모네, 마네 같은

이들이 있었고 문인으로는 베를렌, 발레리, 프루스트 같은 이들이 있었고 음악가로는 드뷔시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언어'를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언어의 지시적 의미 즉 사전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언어가 품고 있는 미묘한 뉘앙스가 중요했습니다.

사실적인 줄거리 보다는 언어와 언어의 조합이 펼쳐내는 신비한 분위기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효과 같은 것에 더 집중했던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빛'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으로서 매우 중요시했습니다.

기존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자연이 고정불변의 것이었다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빛에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풍경이나 사물도 여러가지로 변주돼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 연작을 보면 새벽, 한낮, 저녁 등 햇살의 기울어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성당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드뷔시는 바로 이 상징주의와 인상주의를 음악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기존의 것과 다른 맛을 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드뷔시의 음악은 '귀로 듣는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묘사하는 외부는 '객관적'이거나 고정불변하지 않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경에 주목했던 것처럼 드뷔시도 외부의 세계에서 받은

'어떤 순간'의 느낌을 오선지에 옮겨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아탈리아 북부의 베르가모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온 드뷔시가 1890년 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작곡한 음악입니다.

바그너적인 것과 결별하고 화요회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결심했던 그 무렵입니다.

1곡은 <전주곡> 2곡은 <미뉴에트> 3곡은 <달빛> 4곡은 <파스피에> 입니다.

일단 <달빛>을 여러 번 들어 익숙해지면 다른 곡도 차례로 들어보면 좋습니다.

미끄러지는 듯한 글리산도 주법(높이가 다른 두 음을 미끄러지듯이 계속 연주하는 것) 달빛의 확산을

묘사하는 것 같은 분산화음들이 몽롱하면서도 달콤합니다.

선율 위주의 음악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다소 이 곡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드뷔시의 음악에 맛이 들리면 헤어나오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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