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음악이야기

드뷔시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5. 7. 18:06

드뷔시의 걸작 중 하나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1892년 부터 3년 동안 작곡했습니다.

인상주의 음악의 문을 마침내 열어 젖힌 걸작이며 프랑스 근대음악의 첫걸음으로 기억되는 관현악곡입니다.

드뷔시는 1862년 8월22일 생제르맹앙레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20km쯤 떨어진 작은 도시입니다.

드뷔시는 다섯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고 부모는 그릇가게를 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풍족한 집안은 아니었지요. 게다가 장사도 잘 안됐던 모양입니다.

드뷔시가 태어나고 2년 뒤에 가게를 정리하고 파리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그 후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던 드뷔시의 아버지는 1871년에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진

혁명정부 '파리코뮌'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파리코뮌은 2개월 만에 정규군에게 진압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도 바로 이때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드뷔시가 다섯 살로 추정되는 시절에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귀엽지만 드뷔시 역시 그렇습니다.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꼬마가 세발자전거에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눈매를 약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입니다.

1862년에 태어나 1918년에 세상을 떠난 드뷔시는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 다섯 살 무렵의 사진이 가장 어린 시절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무렵부터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드뷔시 음악선생이었던 모테 드 플뢰르비유 부인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의 장모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베를렌의 아내였던 마틸드 모테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테 부인이 드뷔시를 가르치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베를렌은 17세의 천재 시인 랭보를 향한

동성애적 사랑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된 아내 마틸드와 장모인 모테 부인의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었을겁니다.

 하지만 모테 부인은 그렇게 속을 끓이면서도 어린 제자를 손주처럼 아끼며 정성껏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마 교습료도 거의 못 받았을 겁니다.

드뷔시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경제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테 부인은 참으로 탁월한 선생이었습니다.

어린 드뷔시를 가르친 지 1년 만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시킵니다.

그러니까 드뷔시는 고작 열 살 때 이 유명한 음악원의 입학을 허가받습니다.

할머니뻘인 모테 부인 덕택이었다고 봐야 할겁니다.

그때부터 드뷔시는 12년 동안 이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동시대 작곡가들인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처럼 드뷔시도 한때는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됐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고집스러운 눈매에서도 느껴지듯이 드뷔시에게는 반골 기질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파리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정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교수들과

충돌이 잦았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혁명기의 프랑스를 몸으로 겪으면서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어법과 는 다른 새로운

방향에 대해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접한 바그너의 음악을 통해 풍부하고 새로운 화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예술가적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드뷔시의 음악을 통해 독일-오스트리아와는 다른 프랑스적 분위기를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서 비롯하는 것일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드뷔시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예술에서 나타났던 흐름들을 도외시하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드뷔시의 음악은 당시 프랑스 예술의 새로운 조류였던 시에서의 상징주의, 회화에서의 인상주의와

깊은 연관성을 갖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화요회'라는 예술가들의 모임입니다.

 파리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드뷔시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와

'화요회'에 참여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시인 말라르메가 자신의 집에서 매주 화요일 밤마다 열었던 이 모임에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시에서의 상징주의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을 벗어났던 것처럼 회화에서의 인상주의는

사물의 고유한 색에서 탈피합니다.

 언어가 나의 심상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재생되는 것처럼 사물의 색감이란 빛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

당시 인상주의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고유한 색이란 일종의 고정관념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인상주의자들에게

사과는 빨간색, 바나나는 노란색 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와함께 사물의 정해진 모양, 그 항구적인 형태도 사라져 버립니다.

대상과 배경을 구분해주는 경계 이른바 윤곽선이 흐릿해지면서 아련한 느낌의 몽환적 화풍을 낳았던 것입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이 '귀로 듣는 회화'라고 한다면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관현악으로 그려낸

인상주의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곡은 화요회의 리더였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 할수있습니다.

사실 말라르메가 '목신의 독백'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처음 썼던 시기는 1865년이었습니다.

드뷔시가 고작 세 살 때였지요.  11년 뒤에 말라르메는 이 시를 개작한 '목신의 오후'라는 시집으로

다시 간행했고 당시 그 시집에 삽화를 그린 인물이 인상주의 화가 마네였습니다.

그도 역시 화요회의 멤버였습니다.

 드뷔시는 선구적인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동안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사치스러운 낭비벽과 고급 음식을 즐기는 취향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는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여자와의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고 성격도 병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음악만큼은 맑고 우아하면서도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음악을 추구하며

진정한 프랑스 민족주의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 독일군의 폭격이 맹위를 떨치던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전쟁 중에도 세 곡의 소나타를 작곡하고 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근현대 음악가를 접하며 그들의 사생활이 사뭇 흥미로워집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으로만 애타했던 베토벤과 브람스가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리스트나 드뷔시처럼 수많은 여자를 상대하며 난봉꾼 같은 음악가도 있었습니다.

헨델처럼 음악과 사업을 연계시켜 경제관념이 철저했던 음악가도 있

바흐나 브루크너 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 종교를 중심으로 음악에 매진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은 천재성과 노력입니다.

 

음악이라는 분야는 확실히 하늘로 부터 받은 천재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모차르트는 그 천재성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멘델스존의 천재성도 세계적 대문호 괴테가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천재성이 제대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몸부림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늘로 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영감을 오선지에 그려내고 끊임없이 작곡에

몸부림쳐야하는 노력의 작업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몇날이고 몇달이고 몇년이고 위대한 한 곡의 음악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음악가들은

고뇌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노력하고 정신병을 이겨내며 자신만의 음악을 탄생시켰습니다.

마치 산모가 태아를 출산하듯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모든 음악가들이 겪었습니다.

 그들을 대부분 괴롭혔던 것은 가난과 질병이었습니다.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음악가들은 대부분 생계를 위해 귀족과 돈많은 사업가들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헐값에 팔아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귀족의 하인과 같은 수치도 감수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자와 일찍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끊임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 경우도 허다합니다.

 가난하면 질병도 꼭 따라 붙는것 같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질병때문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음악가들.

모차르트가 좀더 건강했다면 그의 천재적인 명곡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을 겁니다.

베토벤이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가슴을 울리는 위대한 교향곡들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었을 겁니다.

슈만이 적절하게 정신병 치료를 받았더라면 아름다운 그의 곡을 더 풍부히 접했을 것입니다.

쇼팽이 건강했다면 피아노가 들려줄 수 있는 엄청난 매력을 더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았다면 그들의 위대한 음악도 더 많이 들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듭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사생활은 존경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지탄받아 마땅한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음악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며 몸부림쳤던 그들의 열정만큼은 모두가

칭찬받고 존경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한국은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가 나오기 불가능하다.

빌게이츠나 스티브잡스 같은 사업가가 나오기 불가능하다.

세계를 주름잡는 과학자나 예술가가 나오기 불가능하다 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사회구조와 국민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번 실패하면 완전히 낙오자로 찍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사회구조가 그렇습니다.

소위 미끄럼틀 사회라고 하죠. 한 번 미끄러지면 중간에서 누가 잡아주는 사람없이

중산층에서 서민층으로 다시 하층민으로 쭈욱 미끄러져 버립니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사람을 능력부족이니 헝그리정신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또 하나는 국민성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민족은 유달리 정이 많지만 유달리 시기성이 많은 민족입니다.

시장에서 뭐하나 사면 덤으로 잘주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너도나도 잘도와 줍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 보다

시기하고 질투하는면이 특히나 강합니다.

천재가 나타나면 그 천재가 잘 자라서 제 능력을 발휘하게끔 사회시스템이 돌아가야하는데

'그 천재가 뭐가 대단하냐  별 볼일 없다 내 아이도 천재다' 하며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소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서 가만히들 못있습니다.

그러니 수백년 만에 천재가 나와도, 수천만 명 중에 천재가 나와도 그 천재를 귀하게 볼 줄 모릅니다.

그 천재를 내 자식같이 귀하게 대하고 사회시스템이 그 천재를 잘 키워주고 격려해 준다면

왜 우리나라에 모차르트같은 음악가가, 빌게이츠같은 사업가가, 노벨상 수상자가 못나올리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드뷔시로 돌아오겠습니다.

목신의 오후에 등장하는 목신(牧神)은 그리스신화에서 판(Pan)으로, 로마신화에서는 파우누스(Paunus)로

불립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염소 같기도 하고 양 같기도 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징주의 시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칠리아의 초원을 배경으로 물의 요정 님프와

나이아드에게 완전히 반한 목신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잊은 채 그 요정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몽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뷔시는 이 시를 모티브로 삼아 관능성마저 느껴지는 인상주의풍의 음악을 그려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곡은 말라르메의 시를 극히 자유롭게 회화로 표현한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목신의 갖가지 욕망과 꿈이 열기 속을 헤맨다.

님프와 나이아드는 겁을 먹고 달아나고 목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꿈에 취한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악장 구분없이 약 10분간 연주되는 곡입니다.

가장 먼저 플루트가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흔들리는 주제를 연주합니다.

아라베스크 풍의 선율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직은 정신이 몽롱한 목신이 갈대피리를 부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 하프가 가세합니다.

이 주제를 여러 번 변주하면서 목신의 욕망과 몽상을 관능적으로 그려냅니다.

빠른 선율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겁을 먹고 달아나는 요정들의 모습이 상상됩니다.

이어서 환상에 빠져드는 목신의 장면이 점점 고조됩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 약간 우스꽝스러운 느낌의 목관 선율이 잠시 울려 퍼지다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되돌아옵니다. 처음의 아라베스크 주제선율이 다시 연주되고, 아스라한 여운을 남기면서

다시 잠에 빠져드는 목신을 묘사합니다.

 추천음반을 보면,

첫째, 에르네스트 앙세르메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데카의 녹음이 좋습니다.

드뷔시 음악의 프랑스적 감성을 오롯이 구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상주의적 색채감과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가는 몽롱함 등을 잘 표현해낸 연주입니다.

앙세르메의 지휘를 구식일 것이라고 예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실제로 그의 지휘는 여전히

생기 넘치는 감흥을 전해줍니다. 드뷔시의 다른 관현악 걸작들인 바다, 야상곡, 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둘째, 프랑스 태생의 지휘자인 장 마르티농이 프랑스 악단을 이끌고 들려주는 깔끔하고 세련된 연주입니다.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 음악의 표정을 충실하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드뷔시 음악에 관한 한 교과서처럼 가까이 둘 만한 음반입니다. 1910년에 태어난 마르티농은

1970년부터 프랑스 국립방송교향악단을 이끌다가 1976년에 세상을 떴으니 이 녹음은 그의 만년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2011년도 sony classical 음반입니다.

다니엘레 가티는 이탈리아 밀라노태생입니다.  2010년 이후 유럽 무대에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죠. 2016년부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활약중입니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는 그가 2008년부터 음악감독을 맡아 이끌고 있는 가장 밀접한 악단입니다.

현재까지 그의 레코딩 목록은 후기 낭만주의에서 현대까지 걸쳐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드뷔시의 음악입니다.

세부의 뉘앙스까지 섬세하게 조탁해 내는 연주이죠.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적 분위기가 물씬합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뿐 아니라 '바다'와 '영상'을 함께 수록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