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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거슈윈 - 랩소디 인 블루

돌아온아톰 2017. 4. 29. 18:10

우디 앨런이 1979년에 만든 <맨해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앨런은 감독뿐 아니라 영화 속의 주인공 아이작 데이비스 역으로 직접 출연까지 합니다.

직업은 방송 코미디 작가인데 낭만적이고 수다스러우면서도 어린디 소심한 캐릭터입니다.

거대하고 휘황한 도시에서 뭔가 애정결핍 같은 것을 지니고 살아가는 뿔테안경을 쓴 약간

위선적인 지식인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영화는 바로 그 남자, 데이비스의 독백으로 막을 엽니다.

먼저 카메라가 뉴욕의 거대한 빌딩 숲과 사람들의 일상적인 풍경을 하나하나 더듬습니다.

마천루의 야경과 뒷골목의 주차장, 건설 현장과 노동자들, 시위하는 군중, 학교 수업이 끝나고

왁자하게 몰려나오는 아이들, 거리를 지나가는 예쁜 여자들, 키스하는 남녀, 브로드웨이의

명멸하는 입간판, '즐겨요 코카콜라' 광고판, 롱샷으로 잡은 뉴욕 양키즈의 스타디움 같은 것들이

화면 위로 바쁘게 흘러가면서 데이비스가 자신이 쓰고 있는 드라마 대본을 약간 시니컬한

목소리로 읽어나갑니다.

"제1장, 그는 뉴욕을 사랑한다" 는 대사로 시작하는데, 뉴욕에 대해 이런저런 묘사를 늘어놓다가

"이건 아닌데" 하면서 여러 차례 말 바꾸기를 시도합니다.

뉴욕의 매력을 줄줄 늘어놓는가 싶다가다 "마약, 쓰레기 TV, 시끄러운 음악, 범죄"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오기도 하지요. 그렇게 묘한 뉘앙스의 대사로 뉴욕을 툭툭 건드리면서

시작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도입부 장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곡의 음악이 쉬지않고 연주됩니다.

영화 속의 데이비스는 뉴욕에 대해 이렇게 독백하기도 합니다.

"조지 거슈윈의 음악이 고동치는 도시"

그렇습니다.

<맨해튼>의 도입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입니다.

앨런이 자신의 영화 속에서도 표현했듯이 조지 거슈윈은 뉴욕의 음악가 입니다.

비슷한 시기의 미국 음악가로는 아론 코플랜드가 있는데, 그는 대도시 뉴욕보다는 '서부의 음악가'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겁니다. 두사람은 모두 뉴욕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손꼽히지만 음악적으로는 매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거슈윈은 뉴욕의 대중음악, 특히 재즈에서 출발해 그것을 자신의 음악적 특성으로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음악적 수업과정은 거의 독학이었습니다. 물론 거슈윈이 그렇게 자신의 재즈적 스타일을 끝까지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또 어떤 음악적 변모를 보여줬을지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코플랜드는 20대 시절에 잠시 재즈적 스타일을 구사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다 클래시컬한 음악쪽을 지향하면서 거슈윈과는 또다른 맛의 '미국음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음악을 공부하는 과정도 거슈윈의 거의 독학과 달리, 코플랜드는 파리로 유학해 전설적인 음악교사인

나디아 불랑제에게 사사했습니다. 대표작인 <엘 살롱 멕시코> <빌리 더 키드>, <로데오>,

<애팔래치아의 봄> 등에서도 보이듯이, 20세기 초중반의 미국적 자연주의를 음악으로 구사했던

작곡가라고 볼 수 있죠. 매우 광활한 분위기의 음악을 썼습니다.

거슈윈이 작곡한 <섬머 타임>이라는 곡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재즈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 약간 왁자한 분위기의 서곡이 끝나고

곧바로 등장하는 유명한 곡입니다. <포기와 베스>가 오페라 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극 중의 대사를 레치타티보(오페라나 종교극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형식)로 처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음악을 입히지 않고 그냥 대사로만 처리했다면 <포기와 베스>는

음악극이거나 뮤지컬로 불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실제로 거슈윈은 1920년대에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뮤지컬 작곡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34년에 아리아와 레치타티보로 이뤄진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면서

마침내 '오페라 작곡'이라는 영역으로까지 성큼 들어섰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흑인 오페라'라는 숙원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오페라의 등장인물들은 '백인 형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인들입니다.

물론 거슈윈은 흑인이 아닙니다. 코가 유난히 커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완전히 빗어 넘긴

그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약간 흑인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러시아에서

온 유태계 이민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모리스 게르쇼비츠는 189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사랑하던 애인 로자 브루스킨(거슈윈의 어머니)이 가족과 먼저 미국으로 이주하자

그 뒤를 따라 자신도 배를 탔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무렵은 러시아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 격변기의 러시아에서 먹고살기 쉽지 않은 유태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너도나도

미국행 증기선에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오래전의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애상적인 선율의 주제곡 <선라이즈 선세트>로 유명한 이 영화가 바로 당시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유태인 디아스포라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태인 마을을 배경으로  미국 땅에서 만날것을 기약하면서 뿔뿔히 흩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입니다. 거슈윈도 그렇게 미국 땅에 들어선 부모의 네 아이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형제 중에서도 첫째 아이라는 훗날 거슈인이 자곡한 수많은

노래의 가사를 썼던 작사가였습니다.

집에 들여놓았던 피아노도 원래는 첫째 아들 아이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의 피아노가 오히려

동생 조지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이때 부터 거슈윈은 흑인들의 랙타임을 연주하면서 점점

음악에 빠져듭니다. 물론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밖의 여러 대중음악에도 재미를 느꼈을겁니다.

또 거슈윈은 10대 중반에 잠시 클래식 수업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유행했던 피아노곡은

역시 랙타임이었고 거슈윈이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도 바로 그 음악이었습니다.

그에게 재즈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틴 팬 앨리'의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직업음악가로 첫발을 내딛습니다.

출판사에서 한 일은 고객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악보를 사러 온 손님들한테 직접 그 곡을 연주해 들려주곤 했는데, 거슈윈이 바로 그 일을

했던 것이죠. 이런 선전 연주자들을 '송 플러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거슈윈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작곡에도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는 천재였습니다. 특히 '선율의 귀재' 였습니다. 다시말해 거슈윈의 음악은 학습과 이론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저절로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송 플러거로 시작해 서서히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곡가로 성장한 거슈윈이 오늘날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랩소디 인 블루>를 초연한 것은 1924년이었습니다.

당시 뉴욕에서는 '킹 오브 재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폴 화이트먼이라는 지휘자가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그는 대규모 재즈밴드를 이끌고 '심포닉 재즈'라는 장르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사람이 거슈윈에게 재즈와 클래식을 아우르는 협주곡을 써달라고

청탁하면서 <랩소디 인 블루>가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거슈윈으로서는 처음 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랩소디 인 블루>의 악상이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불현듯 떠올랐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심포닉 재즈'가 머릿속에 떠오른 단편적 선율만으로 해결되진 않았을 겁니다.

결국 작곡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주회가 임박해서야 악보를 내놨는데, 그마저도 관현악 부분의

작곡이 미숙해서 화이트먼의 편곡자였던 퍼디 그로페의 도움을 적잖이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랩소디'란 형식이 자유로운 기악곡을 뜻합니다.

예전에는 '광시곡'으로 많이 번역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랩소디로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에서 블루는 우울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재즈의 '블루노트'를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3음, 5음, 7음을 반음씩 내리는 재즈의 독특한 음계를 '블루노트'라고 하는데 <랩소디 인 블루.에서는

바로 이 음계가 빈번히 사용됩니다.

1924년 2월12일, 화이트먼 밴드와 거슈윈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진 초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 몇 해 뒤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청받아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거슈윈은 파리를 방문해 많은 에피소드를 남겨 놓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라벨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당시 거슈윈이 라벨에게 한수 가르침을 청하자

관현악의 마술사로 손꼽혔던 라벨은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라벨마저도 거슈윈을 인정했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유명한 일화인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공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랩소디 인 블루>가 미국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거슈윈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수십 편의 뮤지컬과 수백 곡의 대중가요를 썼지만 오늘날 그를

'미국의 20세기 작곡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 최초의 음악이 바로 <랩소디 인 블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 곡은 거슈윈에게도 작곡가로서의 자의식을 한껏 고양시킨 계기였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던 그는 <랩소디 인 블루>이후, 보다 진지한 음악을 향한 노력을

엄청나게 쏟아 붓지요. 그는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현악법과 화성학

공부에 꼬박 매달립니다.

그 결과가 1925년 12월3일 카네기홀에서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맡아 초연했던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였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작곡된 이 곡을 듣다보면 거슈윈이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얼마나 열심히 음악을 공부했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3악장으로 이뤄진 이 곡은 1악장의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 느린 2악장의 3부 형식, 이어서 빠른 3악장의

론도 형식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거슈윈 특유의 재즈적 선율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배부르고 등 따스한 '흥행 작곡가'가 이렇게 노력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곡들은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F장조>,

그리고 1928년 역시 카네기홀에서 초연된 관현악곡 <파리의 아메리칸> 등입니다.

뒤로 갈수록 음악의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이야말로 '거슈윈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남긴 언급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국내에도 번역돼 나와있는 번스타인의 '음악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거슈윈은 대중음악을 쓰다가 클래식을 작곡한 사람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는 별개의

이야기를 쑤셔넣은 다음, 밀가루 반죽으로 얼기설기 이어붙인 곡입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이래

거슈윈만큼 아름다운 선율을 쓴 사람은 달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율에 있어서 만큼은

슈베르트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요. 거슈윈은 작곡을 거듭할수록 나아졌습니다.

내가 거슈윈의 작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진실함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훌륭해 지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오직 선한 의도만을 가진 작품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는 듣기에 편한 곡입니다. 템포의 변화에 따라 크게 3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몰토 모데라토'로 지시된 1부는 적절한 중간 템포로 흘러가는데, 특히 도입부에서 클라리넷이

유머러스한 글리산도(음에서 음으로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것)를 선보이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이어서 약간 느린 템포로 흘러가는 2부(안단테 모데라토)에서는 피아노가 우울한 랩소디의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감미롭고 애상적입니다.

그러다가 3부로 들어서면 '알레그로 아지타토 미스테리오소'로 템포가 빨라지면서 음악이

급격히 고조됩니다.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인 장면이 펼쳐지다가 피아노와 관현악이

한 덩이가 돼 클라이막스를 이루면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추천음반을 보자면,

레너드 번스타인과 콜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1959년 음반이 있습니다.

국내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이죠. 번스타인이 지휘뿐 아니라 피아노 연주까지 직접 맡았습니다.

녹음 당시 번스타인의 나이는 41세, 한창 젊은 시절의 번스타인이 경쾌한 재즈적 감각으로 음악을

풀어나갑니다. 그는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곡을 녹음해 남겼지만, 젊은 시절의 연주가

더 참신하고 흥이납니다.

두번째는 얼 와일드, 아서 피들러와 보스턴 팝스오케스트라의 1959년 음반이 있습니다.

번스타인과 콜럼비아 심포니의 연주와 쌍벽을 이루는 아니 어찌보면 한층 더 인기와 명성을 누려온

음반입니다. 2010년 95세로 타계한 얼 와일드는 '영원한 청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심장수술을 받은 노인의 몸으로 90세 생일 기념 연주투어를 가졌고,

말년에도 새로운 곡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개성있는 쇼팽 연주 뿐만 아니라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라흐마니노프와 조지 거슈윈의 음악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편곡해 연주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활력 넘치는 낭만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40대 중반에 선보인 이 녹음은 한마디로 호기와

여유가 넘치는 연주를 들려줍니다. 변화무쌍하면서도 매끄러운 템포의 처리가 일품입니다.

세번째는 스테파노 볼라니, 리카르도 샤이와 라이프치히 게반하우스 오케스트라의 2010년 음반입니다.

재즈와 클래식의 접점에 자리한 이 음악을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음반입니다.

스테파노 볼라니는 한국의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도 다녀갔고, LG아트센터에서도 연주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와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수록했습니다.

고색창연한 독일 악단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는 점도 이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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