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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가츠시카는 후지산의 모습을 원경으로 바라봤습니다.

바로 눈앞에서는 집채만한 파도가 사납게 으르렁대고 세 척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습니다.

배가 거의 뒤집힐 것 같은 급박한 상황입니다. 개미만한 크기로 묘사된 배위의 사공들은 넋이 빠진채

어쩔줄 모릅니다. 그리고 멀리에서 머리에 흰 눈을 얹은 후지산이 그 모든 상황을 점잖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의 오른쪽 아래, 그 난리법석인 상황에서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후지산의 모습이 작게 묘사돼 있습니다. 마치 파도 위에 오연하게 떠 있는 한 조각 섬 같습니다.

이 그림은 호쿠사이가 남긴 약 1,000장의 목판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합니다.

계절에 따른 후지산의 풍경을 여러각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채색 목판화 시리즈 <후지산 36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1831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그림을 '우키요에'라고

합니다. 우키요 라는 말은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말처럼 원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의 풍속화를 뜻했는데 점차 의미가 좁혀져서 채색목판화를 일컫는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니시키에라는 보다 정확한 용어도 있지만 우키요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우키요에, 혹은 니시키에는 일본의 전통문화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유럽에까지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우키요에 스타일을 심심치 않게 만날수 있습니다.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난 화가 가츠시카는 자신의 우키요에가 어느정도까지 유명세를 얻게될지

짐작도 못했을 겁니다. 그의 유명세는 에도시대의 일본화가가 상상할수 없었던 지점까지 나아갔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마침내 '일류'(日流)라고 부를 만한 이국풍의 문화애호

바람이 불어 닥쳤고, 그 중심에 가츠시카의 우키요에가 있었습니다.

특히 <카나가와의 큰 파도>는 당시의 일류를 대변하는 그림이었다고 할수있습니다.

 

작곡가 드뷔시도 어느날 이 그림과 대면했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봤는지

그림에 대해 드뷔시가 어떤 소감을 밝혔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인상적인

채색목판화는 드뷔시의 교향적 스케치<바다>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접했던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

'가믈란'과 함께, 이국풍이 마침내 드뷔시의 음악 속으로 상륙했던 겁니다.

드뷔시는 한대 바그너에게 매혹됐다가 청년시절을 벗어나면서 바그너적인것과 결별하게 됩니다.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음악적 특성이라는 차원을 넘어, 유럽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독점에 균열이 가는 장면이기도 했지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문화적 특성으로 거론되는 회화성과 이국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음악가 드뷔시를 통해 동시에

드러났던 셈입니다.

<바다>의 작곡연도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입니다.

가츠시카의 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처럼 드뷔시의 삶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시절입니다.

그중에서도 드뷔시와 사랑을 나눴던 세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긴 어렵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드뷔시의 청년기는 무척 곤궁했습니다.

'아르 누보'(새로운 예술)를 지향했던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그랬을 겁니다.

보헤미안적 삶을 동경했던 그들에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궁핍은 동전의 양면을 이뤘고, 더불어 빼놓을수

없는 것은 낭만적 연애였을 겁니다.

드뷔시 곁에도 가브리엘 듀퐁이라는 동거녀가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함께 지내다가 1898년에 헤어졌는데, 결별의 사유는 가난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남녀의 결별을 오로지 가난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빈곤은 여러가지 문제를

파생시킵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갈등과 다툼이 경제적 이유때문에 생기기 마련입니다.

드뷔시와 듀퐁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드뷔시는 관현악곡 <야상곡>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인상주의'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듀퐁과 헤어지고 이듬해에 만난 릴리 텍시에와 법적인 부부관계를 맺은 후에도 드뷔시의 여성편력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1903년에는 은행가 바르닥의 아내 엠마와 도피행각을 벌였고,

버림받은 아내 릴리는 권총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지요. 다행히 목숨은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당시 프랑스 문화계에 커다란 스캔들로 떠올랐습니다.

남녀상열지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드뷔시가 어느덧 주목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리 뒷골목을 함께 누볐던 과거의 동료들, 여전히 보헤미안의 삶을 살고 있던 친구들조차

드뷔시를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 삿대질 속에는 인간적 비난과 음악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렇게 드뷔시를 비난했던 사람들 중에는 에릭 사티도 있었습니다.

관현악곡 <바다>는 바로 그런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드뷔시는 치정의 열풍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점차 확고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바다>를 완성하던 1905년에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 슈슈를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드뷔시는 격랑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던 행운아였을 뿐 아니라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그의 창작적 에너지는 하이라이트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가 펼쳐낸 '음악적 인상주의'는 외부세계의 질적인 고유성을 허물어뜨렸다는 점에서 현대적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드뷔시의 음악에서 발견하는 것은 풍경이라는 이름의 객관적 외부가 마침내 자아 속으로

흡수돼 재구성되는 장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드뷔시는 <바다>의 작곡에 착수할무렵, 열 살쯥 손위인 작곡가 앙드레 메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다가 부르고뉴의 비탈진 언덕을 어떻게 씻어 내릴수 있겠냐고 당신은 말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보다 나의 감각에 선명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본인의 음악적 회화성에 대한 언급을 여러차례 남깁니다.

그중에서도 음악은 색과 리듬을 가진 시간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인상주의 음악의 요체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언급 주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드뷔시는 자연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 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이말은 객관과 주체의 미묘한 상호작용 으로 단어를 바꿔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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