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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20세기 작곡가들을 거론하면서 절대 빼놓고 갈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입니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와 더불어 혁명기의 러시아, 이후의 스탈린 체제를 함께 겪었던 음악가였습니다.

쇼스타코비치보다 15년 연상이죠. 둘 다 20세기 새로운 음악 이른바 모더니즘을 지향했던 까닭에

소비에트의 통제적 분위기 속에서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프로코피에프는 스탈린과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3년 3월 5일이었습니다. 사인은 뇌출렬이었습니다. 물론 독재자와 음악가의 '같은 날 죽음'이라는

사건은 어쩌다 일어난 우연일 겁니다.

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의 회고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그는 순회연주를 하느라고 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다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는

아울러 빨리 모스크바로 귀환하라는 당의 전보를 받습니다.

그렇게 당의 명령을 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중에 악천후로 비행기가 흑해 근처의 수후미에

착륙했을때 선배 음악가 프로코피에프의 부음을 듣게 됩니다.

모스크바에 당도한 리히테르는 독재자의 장례식에서는 마음에도 없는 혐오스럽고 불쾌한 연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저 샤워가 하고 싶었다. 스탈린이 죽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프로코피에프의 죽음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리히테르는 생전에 딱 한 편의 글을 써서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프로코피에프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일종의 추도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애도를 감상적

필치로 털어놓고 있는 글은 아닙니다. 자신이 겪은 프로코피에프의 인간적 풍모와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게 무뚝뚝하게 털어놓는 증언이 오히려

더 추모의 진정성을 느끼게 합니다.

 

리히테르에게 프로코피에프는 꽤나 어려운 존재였나 봅니다.

"그는 늘 나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라는 표현이 서두에 등장합니다.

아마 그 위압적인 이미지는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리히테르는 자신이 열두 살이었던

1927년에 오데사음악원 연주회장에서 프로코피에프를 처음 봤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 홀은 상당히 어두원 편이었다. 키가 크고 팔이 기다란 청년 한 사람이

무대로 등장했다. 그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바지가 깡똥하고

소매가 짧은 재단이 자못 신기해 보였다. 청중에게 인사를 하는 방식도 아주 별났다.

몸이 갑자기 툭 부러져 둘로 나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사에 앞서 정면을 주시할때나

몸을 구부렸다가 일으키며 천장의 한 지점을 응시할때나 그의 눈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에 표정이라곤 없는 사람 같았다"

고작 열두 살 때의 기억을 거의 30년이 흘러서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리히테르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시각적 기억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리히테르가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했던 음악가 프로코피에프는 1891년 우크라이나의 존트조브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영주의 땅을 관리하는 우리 식으로 치면 '마름' 같은 일을 했고 어머니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당연히 어머니로 부터 음악을 접하고 배웠을 겁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음악교육에 상당히 열성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고향인 존트조브카는 예술과

거리가 먼 시골이었지만 프로코피에프는 여덟살 무렵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지에서 오페라와 발레를 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프로코피에프는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당연하게도 피아노 음악은 그가 남긴 작품들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가 그렇지요. 그는 전부 9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그 작곡 시기가

거의 평생에 걸쳐있습니다.

그렇게 평생토록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작곡한 세 곡의 소나타를

전쟁소나타라고 부릅니다. 그중 대표적인 걸작이 <피아노 소나타 7번 B플랫장조>입니다.

음악이 매우 강렬하여 강철의 소나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듣는 이의 몸을 해머로 두들기듯이 육박해오는 음악의 에너지가 막강합니다.

약 18분의 비교적 짧은 곡이지만 오디오의 볼륨을 높이고 집중해 듣노라면 심신이 얼얼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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