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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모차르트 - 레퀴엠 d단조

돌아온아톰 2017. 4. 28. 13:22

3살 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고 5살 때 작곡을 했으며 7살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8살 때는 교향곡을

작곡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12살에는 오페라까지 작곡한 서양음악사의 최고 천재 바로 모차르트(1756-1791)입니다.

그는 괴테의 표현대로 '능력을 가늠할 길이 없는'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 작곡가였습니다.

오죽하면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대의 축복' 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모차르트는 전 음악 장르에 걸쳐 걸작들을 남겼는데, 알려진 것만도 628여 작품에 이릅니다.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피아노 연주실력이 놀라웠으며

작곡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어린 모차르트에게 철저한 음악 수업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뮌헨과 빈, 파리,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며 각국의 음악적

특징들을 두루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 결국 고전파 시대의

음악적 절정을 이뤄 냈습니다.

모차르트를 가르쳤던 스승들은 모두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압도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5살의 모차르트를 가르쳤던 하이든도 '나는 더 이상 이 천재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가 없다.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정도이다. 그는 내가 아는 최고의 작곡가다' 라며 찬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천재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아 수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신동 모차르트라는 소문에 둘러싸인 그의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습니다.

여섯 살에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여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14살 때에는 로마 교황청 바티칸 궁정에 있는 시스틴 예배당에서 딱 한 번 듣고 나서

10여분짜리 합창곡을 기억만으로 정확히 사보해 낼 정도로 뛰어난 천재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의 뛰어난 음악성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최고의 음악가로 만들기 위해

유년시절의 대부분(약 17년)을 유럽 각지를 돌며 각국의 음악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 여행은 어린 모차르트에게는 매우 혹독한 일이었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및 이탈리아에서

왕족과 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청년으로 성장한 모차르트는 가극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베버의 조카 딸 알로이자 베버를 만하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음악 이외는 허용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사랑에 실패하고

파리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파리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신동 모차르트를 열렬히 환영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관심을 갖던 파리의 대중들은

이제 청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보여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로 인해 모차르트는 경제적,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 갑니다.

고향에서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음악에 심취해 있던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과소평가했으며,

그로인한 대주교와의 불화가 끊이지 않아 모차르트는 결국 궁정음악가의 자리를 사임하고 쫓기듯

빈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빈에서 새로운 생활을 모색하던 모차르트는 알로이자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음악을 가르치거나

곡을 만들어주면서 가정을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현실 생활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격도 괴팍하고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일쑤였으며, 음악 이외의 일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잠시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화려했던 어린시절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너무나

궁핍했으며 친구들도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또한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을 시기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살리에르의 중상모략과 방해로

빈에서의 생활도 평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극심한 가난과 싸우던 이 시기에 <교향곡 39, 40, 41번>, <클라리넷 5중주>, 오페라 <마술피리>

같은 최고의 걸작들을 만들어 냅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날은 1791년 12월 5일입니다.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가 초연되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사실 모차르트는 생애 마지막 해에 들어서면서 잔병치레를 자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되지만 그 자체로 죽을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일한 것이 결국 화근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병증이 폭발하고 맙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로 혼수를 헤매다 사망했다고 합니다.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도 류머티스 열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현대의학이라면 모차르트가 결코 죽음에까진

이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다섯 살이었습니다.

 

이틀 후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참으로 초라한 장례였다고 합니다.

친구 열명과 가족 여섯 명이 모인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아내인 콘스탄체는 아파서 누워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임신 중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나빴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가 모차르트의 묘지가 어딘지를 확인할 수 없는 비극적인 난센스가 시작됩니다.

날씨가 웬만했으면 그날의 문상객들은 시신을 실은 마차를 뒤따랐을 겁니다.

그러나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마부가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친구들은 운구 마차를 뒤따라가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아내인 콘스탄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릅니다.

장례가 끝난 뒤에라도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야 두 번째 남편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1761-1826)과 무덤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매장했던 인부가 세상을 떠난 뒤였던 거였습니다.

콘스탄체는 1809년에 재혼했으니, 적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거의 20년이 흘렀을 무렵입니다.

게다가 뒤늦게 무덤을 확인하려고 했던 이유도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덴마크의 외교관이었는데, 모차르트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수집가였습니다.

훗날 모차르트의 편지들을 토대로 평전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한 무덤 찾기는 전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도 많은 여행객들이 빈 3구의 성 마르크스 묘지, 모차르트가 누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좁고 가난한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어디가 과연 모차르트의 무덤 자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d단조>의 작곡을 의뢰받은 것은 1791년 늦은 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찾아와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요청합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그 사내를 검은 옷을 입은 죽음의 신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에쿠우스>로 유명한 영국의 극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을 토대로 제작됐는데,

오랫동안 세간을 떠돌았던 '모차르트 독살설'을 드라마의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연극과 영화는 어느 날 모차르트를 찾아왔던 그 '검은 남자'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군림햇던

살리에리(Antonio Salieri(1750-1825))의 하수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모차르트를 방문했던 사람은 빈의 음악애호가였던 발제크 슈투파흐(Franz Walsegg Stuppach(1763-1827))

백작의 하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백작이 같은 해 2월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도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작곡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 그 곡을 사서 자작곡으로 발표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작곡인 것처럼 꾸며서 곡을 받으려면 당연히 돈을 더 줘야 했을 겁니다.

당시 백작이 모차르트에게 약속했던 금액은 50두카텐이었다고 하는데, 이 금액은 당시 대학교수 평균연봉의

다섯 배쯤이었다고 합니다.

1791년의 모차르트는 갖가지 잔병에 시달리며 과중한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백작은 약속된 금액의 절반을 선수금으로 주기까지 했습니다.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모차르트에게 금화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던져 줍니다.

불쌍한 모차르트입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해에 최후의 피아노 협주곡인 <27번 B플랫장조>를 완성해 초연했고 <현악5중주 6번>과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를 썼습니다. 열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소품들을 작곡했고

가곡과 아리아,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 두 곡, 아름다운 선율의 모테트 <아베 베룸 코르푸스>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두 편의 오페라가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뭐니뭐니 해도 당시의 오페라계에서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1791년 중반에 손을 댔던 <마술피리>의 작곡을 잠시 멈추고 <티토 황제의 자비>를 먼저 완성해

상연한 다음, 곧바로 <마술피리>를 최후의 오페라로 완성해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두 오페라의 완성과 초연은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걸쳐 이뤄졌습니다.

그야말로 숨 쉴 틈 없는 작곡 스케줄이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세 개의 대작(두 편의 오페라와 레퀴엠)에서 받았을 과로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을 겁니다.

결국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11월 하순에 앓아 누운 모차르트는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애통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라크리모사(Lacrimosa(눈물의 날))의 작곡을 8마다에서 중단한 채 급기야 눈을 감고 맙니다.

그러면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은 어디인지 의문이 듭니다.

우선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인트로이투스(Introitus(입당송))는 모차르트가 전부 작곡했습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eis Domine)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레퀴엠>중에서도 가장 압권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입니다.

레퀴엠은 '안식'이고, 아에테르남 '영원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첫머리의 가사가 이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어서 모차르트는 2곡 '키리에(Kyrie(불쌍히 여기소서))부터 3곡 '세쿠엔치아(Sequentia(이어지는 노래들)),

4곡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봉헌송))을 부분적으로 작곡했습니다.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 파트의 일부를 직접 작곡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절반가량을 작곡하고 눈을 감은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되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가 다급해졌을 겁니다.

선수금은 이미 받아 쓴 상태이고, 나머지 부분을 마저 작곡해야 의뢰자로부터 잔금을 받을 수 있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콘스탄체의 부탁을 받고 마무리 작업을 최종적으로 해낸 이가 바로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ussmayr(1766-1803))였습니다.

사실 그가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시기는 1790년 혹은 1791년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작곡을 배웠다고 해도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의 악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충했고, '라크리모사'의 9마디부터,

그리고 5곡 '상투스(Sanctus(거룩하시도다))', 와 6곡 '베네딕투스(Benedictus(주의 축복 있으라))',

7곡 '아뉴스 데이(Agnus Dei(하나님의 어린 양))' 를 추가로 작곡합니다.

 

즉, 1곡 인트로이투스 - 2곡 키리에 - 3곡 세쿠엔치아 - 4곡 오페르토리움 - 5곡 상투스 - 6곡 베네딕투스 -

7곡 아뉴스 데이 - 8곡 코무니오(Comrnunio(영성체송)) 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3곡 '세쿠엔치아'는 모두 6부로 이뤄져 있는데,

Dies irae(진노의 날)

Tuba mirum(고요한 나팔)

Rex tremendae majestatis(어질고 권위 있는 대왕이여)

Recordare jesu pie(자비로운 예수여 기억하소서)

Confutatis maled ictis(저주받은 자를 부끄럽게 하소서)

Lacrimosa(눈물의 날)

 

가사는 라틴어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모차르트의 작곡이고, 어떤 부분을 사후에 추가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두 부분은 음악적 숙련도와 깊이에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특시 3곡 '세쿠엔치아' 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눈물의 날'은 애통하고 비극적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장례식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울려 퍼집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d단조>를 훌륭하게 담아낸 음반을 소개하자면,

1. 카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가극장 합창단(1971년. DG)이 있습니다.

이른바 전통적인 명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카를 뵘은 1956년도 빈 심포니와 빈 국립가극장 합창단을 이끌고

같은 곡을 녹음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노 녹음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녹음은 77세의 뵘이 15년 만에 두 번째로

녹음한 <레퀴엠>입니다.  오케스트라도 빈 심포니가 아니라 빈 필하모닉입니다. 템포가 너무 느리다는

지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랑받아온 녹음입니다. 유장한 흐름으로 음악에 내재한

비극성을 짙게 투영시키는 느낌의 연주인데 모차르트를 베토벤처럼 해석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들어봐야할 음반으로 손꼽힙니다.

2.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고음악 아카데미(1980년대 Decca)가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여러 판본으로 연주됩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본문에서 설명한 쥐스마이어 판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는 쥐스마이어 판본과는 확연히 다른 리처드 몬도 판본으로 연주합니다.

쥐스마이어의 작곡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투스' 와 '베네딕투스'는 아예 연주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여러 연주 중에서도 '골계미'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녹음이죠.

매우 순도 높은 정격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의 깨끗하고 직진하는 목소리는

이 음반만의 각별한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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