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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말러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4. 30. 19:15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황무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우리에게는 더 잔인한 달입니다. 2014년 4월16일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해 모두 304명의 생명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잔인한 달 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은 독일의 시인 클롭슈토크의 '부활'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일어서라, 다시 일어나... 가혹한 사랑의 투쟁 속에서, 나는 솟구쳐 오르리라... 일어서라

그래 다시 일어나, 그대 내 마음이여 어서 일어서라!"

이 교향곡은 죽음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부활을 꿈꾸고 있는 음악입니다.

말러가 완성한 교향곡은 모두 10곡인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스물여덟 살이던 1888년에 첫 번째 교향곡인 '교향곡 1번 거인'을 완성하고 곧바로 이 두 번째

교향곡을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완성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 말러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이 지휘자가 세상을 떠난 1894년에 그의 추도식에서 영감을 받아 마지막 악장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스케치에서 완성까지 6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기말의 작곡가 말러는 전작인 '교향곡 1번 거인'의 연장선상에서 이 곡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교향곡 1번 거인의 음악적 화자였던 거인이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곡입니다.

물론 말러는 훗날 교향곡 1번에서 거인이라는 표제를 아예 없애 버렸지만 '교향곡 2번 부활'의

첫 번째 악장을 작곡하던 무렵에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구상은 여전히 '거인의 죽음'이었습니다.

말러는 베토벤의 아홉 번째 교향곡 '합창'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의 합창을 자신의 음악적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말러가 흠모했던 작곡가 바그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그너는 문학과 음악이 혼연일체된 종합예술을 추구했고, 말러도 자신의 교향곡에서 그런 이상을

실현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초기 교향곡들을 일종의 교향시로 간주했습니다.

물론 훗날의 말러는 자신의 음악이 표제없이 연주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적어도

두 번째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의 말러는 문학적 언어를 합창으로 표현해 내는 일종의 칸타타 심포니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의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츠의 시에서 착상을 얻어

단어장의 교향시를 작곡했고, 그 곡에 '장례식'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향곡 2번 부활'의 1악장입니다.

하지만 말러는 교향시 '장례식'을 작곡한 이듬해에 잇따른 슬픔을 겪습니다.

같은 해 2월에는 아버지가, 10월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떴습니다. 이어서 여동생 레오폴디네가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말러가 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완성하고 3년 뒤에 실제로 장녀 마리아를 잃었던 상황과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인생과 예술은 별개가 아니다"라고 믿었던 말러에게 애통한 운명이 뒤따르면서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의 곁에서 노상 서성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1907년에 썼던 아홉 번째 교향곡을 9번으로 칭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명명했던 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심장병을 지병으로 안고 살았던 그는 베토벤과 브루크너가 9번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일종의 터부로 받아들였고, 그 운명의 화살을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애써 피하려는 자에게 운명은 더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인지, 말러는 '대지의 노래'이후

작곡한 교향곡에 결국 '9번'이라는 번호를 붙였고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9번은 말러가 완성한 마지막 교향곡입니다.

'교향곡 2번 부활'의 작곡은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겪어야 했을 뿐더러

지휘자로서의 공적활동도 바빴던 탓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창작의 영감이 찾아온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894년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러가 그 영감의 번갯불을 맞았던

장소 역시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식장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음아계의 가장 영향력 있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가 그래 2월12일에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망했고, 3월29일에는 독일 함부르크의

미하엘리스 교회에서 추도식이 치러졌습니다. 물론 말러도 그날의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침재 번갯불 같은 영과과 만납니다. 식을 진행하던 중에 울려 퍼진

클롭슈토크의 '부활'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기록을 말러는 이렇게 남겨놓고 있습니다.

 

"오르간 연주대에서 합창단이 클롭슈토크의 부활을 노래했다. 그것은 번갯불처럼 나를 때렸다.

내 영혼의 눈앞에서 모든것이 분명하고 뚜렷해졌다. 모든 예술가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교향곡 2번 부활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5악장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말러는 클롭슈토크의 가사를 일부 수정해 자신의 음악 속으로 끌어들였고, 마침내 '부활'이라는

칸타타적 교향곡을 완성했습니다. 특히 이곡의 마지막 가사는 말로 스스로 쓴 것입니다.

"나는 날아가리, 살기 위해 죽으리, 일어서라 그래 다시 일어서, 그대 내마음이여 어서 일어서라!"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은 말러의 어록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회자됩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리하트트 슈트라우스를 염두에 둔 발언입니다.

말러가 네 살 아래의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던 때는 1888년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때였는데 성악가 요한나 리히테르를 향한 사랑이 실연으로 끝나고 첫 번째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작곡했던 것이 그로부터 4년 전 이어서 그 연가곡의 선율을 모티브로

삼아 교향곡 1번 거인을 완성했던 해가 바로 1888년이었습니다.

당시 말러는 바흐의 도시로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지휘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첫 대면한 두 청년은 독을 후기 낭만음악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기질과 음악적 스타일이 매우 달랐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경쟁했습니다. 특히 상대방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슈트라우스보다 말로 쪽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말러가 성격적으로

더 내향적인데다 내면적으로 복잡한 사람이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그의 아내였던 알마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정확한 문장을 보면,

"그의 시대가 가고 나면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그"가 슈트라우스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말러의 말은 알마가 말러 사후에 썼던 세 권의 책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을 내건 책을 평생에 걸쳐 세 번 썼습니다.

1924년, 1940년, 1960년에 각각 쓰인 그 책들은 때때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오늘날 인간으러서든 음악가로서든 말러 연구의 기초자료로 빈번히 인용됩니다.

말러는 현세적 자기부정이 개인적 기질에서 비롯함은 널리 알려진 해석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분열적 자아상은 이미 유년기에 또아이를 틀었습니다. 숲집 포주라는

직업을 갖고 있던 마초적인 아버지 베른하르트, 만성두통과 심장병을 앓았던 심약한 어머니 마리,

부모의 불화뿐 아니라 술집에서 노상 들려오던 주정과 매춘의 소음, 열다섯 살에 겪었던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 등등, 훗날 말러가 "나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라고 술회했던

그 이면에는 유태인과 카톨릭, 그리고 보헤미아 태생이라는 세가지 사실 이외에 이미 유년의

상흔들이 존재했음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말러는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이었던 1910년 여름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 평생토록 자신을 지배해온 트라우마들을 털어놓고 시인합니다.

그렇게 내면적 상처가 많았던 말러의 음악적 본령은 당연히 교향곡입니다.

그는 피아노곡이라든가 실내악,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가곡을 여러 작품

남기긴 했지만 그 가곡들의 상당수도 종국에는 교향곡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말러의 교향곡들은 이전의 교향곡들이 보여줬던 전통적 형식, 기승전결의 구조에서

말찌감치 벗어납니다. 오히려 이중적 자아에 시달리는 개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울러 삶의 우연성이나 감정의 즉흥성 같은 요소들, 예컨대 계몽주의가 아직 건재하던 시절에만

해도 비이성적인 것으로 손가락질 받던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런 이유로 그의 교향곡들에는 돌연한 변화가 빈번히 등장하고 듣는 이에 따라서는 장황하다고

느껴질 만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에게 내려져있는 음악사적 평가는 아마도 낭만파적 교향곡의 마지막 작곡가 일 겁니다.

뒤집어 보자면 음악의 입구에서 과도기의 혼란을 겪어야했던 음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러는 그 과도기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분열적 자화상을 음악에 투영했습니다.

그렇게 근대로 접근해 갔습니다.

'교향곡 5번'에서 나타나는 악장들 사이의 급격한 변화들도 말러가 지녔던 짙은 고뇌를 보여줍니다.

물론 그 분열의 양상을 오로지 말러 개인의 내면으로만 읽어 낼 수는 없습니다. 당대 현실 속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향곡 5번이 보여주는 분열의 양상은 '세기말'이라는

외적요인의 개입없이는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미 검증됐다시피 세기말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맞이한 첫 번째 좌절이었으며 머잖아

다가올 공황의 전조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거인으로 다가와 있는

말러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자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곡을 쓰던 20세기 초반 정확히 말해 작고에 착수했던 1901년에 말러는 이미 40대라는나이에

들어서 있었으며 그는 세기말의 모든 양상이 집약된 도시 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898년 빈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취임한 말러는 190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을 떠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약 10년간 빈에 머물렀습니다.

당시의 빈은 베네치아와 더불어 세기말을 대표했던 도시입니다. 제국주의가 꿈꿨던 이상향은

적어도 겉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였지만, 도시와 사람들의 외양을 화려하게 수놓은 탐미주의는

황폐한 속살을 간신히 감춘 외피 불과했습니다.

당시의 40대가 오늘의 동년배에 비해 얼마나 더 성숙했는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말러는 유년기의

불안의식에 더해진 시대의 균열을 이미 특유의 촉수로 감지한 상태였습니다.

말러 스스로 4부작이라고 칭했던 앞의 교향곡들과 확연히 다른 다섯번째 교향곡은 바로 그 시점에서

태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음악평론가 알레그 로스가 '나머지는 소음이다'라는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급은 정확합니다. 그는 교향곡 5번을 작곡하던 무렵에 말러가 처해 있던 심적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이도시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균열이 곧 터져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 들이는 것처럼 예민했으나 양심적인 음악가였던 그는 청년시절에

자신이 동경했던 적어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서정과 평화로운 목가풍을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교향곡 5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 막을 올립니다.

1악장은 특이하게도 장송행진곡이 10분 넘게 펼쳐지는 해괴한 악장입니다.

게다가 군대의 행진나팔처럼 들려오는 도입부의 트럼펫 팡파레. 그것은 오늘날 매우 감각적인

록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빈 사람들이 듣기엔 진부하다고 느낄만큼

보편적인 나팔소리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말러는 별다른 음악적 가공없이 날것 그대로의 나팔소리를

교향곡의 입구에 깃발처럼 내걸었습니다.

수많은 음악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이 2악장은 추락의 악장입니다.

치솟아 오르거나 가득 차올랐다가 힘없이 주저않아 소멸하는 장면들이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주제를

재현하다가도 중간에 고개를 푹 떨어뜨린채 그대로 침잠학고 맙니다. 아도르노는 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을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설명했거니와 이른바 '파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

이라는 해석입니다.

호른이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는 3악장은 스케르초악장입니다. 스케로초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주시간이

약20분에 달하는 이 악장에는 말러의 교향곡에서 빈번히 얼굴을 내비치는 왈츠풍 무곡이 역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춤은 빈의 은성한 무도회를 연상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골들의 기괴한 춤처럼 들려옵니다.

이어서 4악장은 아다지에토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악장입니다. 말러가 "사랑의 고백"이라고 아내 알마에게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이 악장은

유명인사들의 장례식장에서 빈번히 연주되면서 엇갈리 수용의 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5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적 악장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인이었던 말러는

마지막 악장에서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맙니다. 앞의 3개 악장에서 세계와의 갈등이라는 측면을

극한까지 묘사해던 말러는 마침내 마지막 악장에서 임이 빠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베토벤 이후부터 낭만까지를 관통해온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도르노는 이 절충주의적인 마지막 악장에대해 '강요된 화해'라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가장 널리 알려진 4악장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일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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