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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브루크너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5. 6. 12:19

음악이 대중적인 것과 순수한 것으로 나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런 식의 이분법으로 음악을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19세기의 음악가들은 그냥 음악가였습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좀 더 후대로 내려와서는 리스트나 파가니니 같은 비르투오조 계약의

음악가들 혹은 점잖고 묵직한 이미지로 표상되는 브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순수하고 고급스러운 음악가들로 인식되는 그들조차도 당대에는 그저 음악가로만 존재했습니다.

말하자면 음악적 순수함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까지 두루 갖춘 음악을 써내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변화인 자본주의 체제의 도래는 음악의 엔터네인먼트적 요소를 더욱

부채질했을 겁니다. 콘서트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대중매체는 이른바 스타음악가를 찾아내 그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겠죠. 그렇게 근대로의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음악에서의 대중성이라는 요소가

이전 시대에 비해 점점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세기의 문화사적 풍경이었습니다.

안톤브루크너는 바로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다간 음악가입니다.

이른바 후기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했던 그의 삶은 20세기를 고작 4년 앞두고 막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이 마흔 살이 넘어서야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으니 활동시기가 주로

19세기 후반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대중성이 음악에서 점점 중요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브루크너는 그런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도시 린츠에서 남쪽으로 약 15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안스펠덴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성품이 매우 우직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엄격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습니다.

이런 특성들은 당연히 그의 음악에도 반영돼 있습니다.

특히 9개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은 웅장하고 광대한 음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곤 합니다.

그 뿌리를 더듬다 보면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에서 울려나오는 웅장한 음향과 그의 교향곡들은 매우 밀접한 친연성을 보여줍니다.

브루크너는 시골학교 교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본인도 교사로 일했습니다.  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브루크너는 열여섯 살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듬해에 보조교사로 교편을 잡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직업을 물려받은 것뿐 아니라 오르간도 배웠습니다.

시골성당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열살 무렵부터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약 2년 뒤에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수도원은 브루크너의 음악적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는 1845년부터 1855년까지, 이 수도원에서 처음에는 교사로 나중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10대의 일정 기간과 20대의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수도원에서의 삶이 그의 음악과 인간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브루크너는 바로 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음악에 대해 심도있는 학습을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작곡가로서의 행보를 내딛기도 합니다.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d단조의 레퀴엠과 b플랫단조의 장엄미사가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음악들입니다.

브루크너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손꼽히는 몇 번의 이주는 1856년 린츠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한 것

또 1868년 음악의 도시 빈으로 들어선것 등 입니다.

물론 빈으로 가기 전 1863년에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를 보고 받았던 충격은 그의 교향곡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삶에서 가장 근원에 자리했던 마음의 고향은 역시 성 플로리안 수도원이었습니다.

도시 생활을 두려워했던 약간의 은둔자적 성향, 시골 농부와도 같은 우직한 성품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을 겹겹이 쌓아올리는 듯하고 웅장한 대성당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교향곡들은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적 연보에서 눈에 띄는 장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성악을 포함한 종교음악이지요. 특히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작곡했던

<미사곡 3번 f단조> 브루크너가 남긴 종교음악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테 데움> 등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브루크너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이유는 역시 교향곡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가 음악가로서 입지를 어느정도나마 굳힌 것은 40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서양 음악사를 수놓은 수많은 천재들인 모차르트, 슈만, 쇼팽, 리스트, 브람스 같은 이들이 20대 초반에

이름을 날린 것에 비하자면 참으로 대기만성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브루크너의 음악적 여정에서 커다란 자극이 됐던 인물로 바그너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루크너는 서른아홉 살이었던 1863년에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봤고 2년 뒤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갑니다. 이때 바그너를 직접 만나기도 합니다.

바로 이렇게 바그너에게 큰 자극을 받으면서 브루크너는 마침내 교향곡 작곡에 손을 댑니다.

1863년에 자신의 첫번째 교향곡이었던 <교향곡 f단조>를 작곡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습작이라고 평가절하합니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교향곡 d단조>를 작곡합니다.

이 곡은 훗날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었던 1895년에 작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곡입니다.

그러니까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곡이었습니다.

브루크너는 다시 발견한 이 곡의 악보에 0번 이라고 써놓고는 '전혀 써먹을 수 없는 단순한 시험작'이라고

부기합니다.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쨌든 그는 바그너의 대담한 화성과 조바꿈, 거대한 관현악적 규모, 관악기들의 힘찬 음향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빈번히 연주되는 그의 교향곡들이 보여주는 특징도 그렇습니다.

특히 브루크너는 린츠를 떠나 빈으로 이주한 다음부터 교향곡 작곡에 더운 매달립니다.

음악의 도시 빈에 들어설 때가 1868년이었고 그의 나이 마흔네 살이었을 때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마흔네 살 정도면 젊은 층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사정이 많이 달랐습니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는 요절한 음악가들이고, 베토벤이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때가

57세였습니다.  또 말러가 10번 교향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난 시기도 쉰 살을 갓

넘겼을때입니다.

브루크너는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날고 긴다는 음악가들의 각축장이었던 빈으로 옵니다.

그때부터 7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8년 동안 빈의 음악가로 삽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지요. 빈의 주류 음악가들은 안스펠덴 출신의 촌뜨기를 대놓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브루크너는 요즘말로 '듣보잡'이었지습니다.

게다가 브루크너는 사교와 정치에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주류사회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세련된 매너와 화술을 전혀 갖추지 못한 그야말로 촌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브루크너가 빈에 도착했을 무렵 당시 음악계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요. 한편에는 브람스를 지지하는 정통주의자들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바그너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19세기 음악사의 마지막 논쟁을 대변하는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이 치열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루크너는 바그너 신봉자였습니다.

우직한 성품의 그는 대놓고 바그너 편을 들었습니다.

당연히 반대파로부터 험한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음악비평가 한슬리크의 브루크너 비판은 집요하고 노골적이었습니다.

브람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브루크너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음악적 논리가 결여돼 있고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엉성한 음악", "바그너를 숭배하는 노예" 등의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물론 브루크너를 공격했던 인물들은 그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브람스 진영을 대표했던 한슬리크라는 당대에 상당한 음악적 권력을 휘둘렀던 그의 악평은

브루크너를 꽁꽁 옭아매는 사슬로 작용했습니다.

그 덕분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고생이 막심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빈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빈 필하모닉은 한때 브루크너의 교향곡 연주를

아예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국한하자면 브루크너는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브람스를

오히려 능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브람스는 브루크너보다 아홉 살 연하이지만 슈만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 이미 음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브루크너가 빈에 발을 들여놨던 1868년에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1897년에 64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교향곡 분야에서 4곡의 음악을 남기는데 그쳤습니다.

반면에 브루크너는 빈에서 살던 28년 동안 교향곡 2번부터 9번까지 모두 8곡을 작곡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교향곡은 개성과 색감이 많이 다릅니다.

회상빛 우울함을 주조로 삼고 있는 브람스의 교향곡에 견주자면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은 훨씬 찬란한 음색을 구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빈의 음악계에서 오래도록 조롱의 대상이었던 브루크너에게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이 다가온 것은

1884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딱 오십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 30일 독일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극장에서 <교향곡 7번 E장조>가

초연됩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브루크너가 그때까지의 음악인생에서 맛봤던 최고의 기쁨 어쩌면 최초의 기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인도 이에 대해 "박수 소리가 15분 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교향곡 7번>은 그렇게 라이프치히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 이후 뮌헨과 빈에서도 연주되면서

브루크너에게 드디어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줍니다.

<교향곡 7번>은 느린 2악장 때문에 유명합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약 20분가량의 긴 악장입니다.

듣는 순간에 곧바로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이 등장합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브루크너가 이 곡을 작곡했던 것은 1881년부터 1883년까지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빈에서 초연하는 것이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초연할 것을 권한 인물은 제자이자 친구였던 요제프 샬크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쉬입니다.

훗날 한스 폰 뵐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죽을 때까지 이끌었던 지휘자이고

20세기의 여러 지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헝가리 태생의 그는 1879년부터 라이프치히 오레파단을 지휘했는데 바로 그 몇 해 뒤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 E장조>를 초연했습니다.

교향곡 7번 E장조는 본격적으로 금관의 규모를 확장한 곡입니다.

바그너가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를 사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금관악기 '바그너 튜바'를 네 대나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바그너 신봉자다운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브루크너는 이후의 교향곡들 즉 8번과 9번에서도 계속해서 이 악기를 사용해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18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896년까지 그는 거의 해마다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또한 이미 작곡한 교향곡들을 다시 고치는 작업을 쉼 없이 병행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중에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헌정한 곡도 있습니다.

1872년에 작곡했던 <교향곡 3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고도 불립니다.

<교향곡 4번>은 1874년에 처음 작곡했고 1878년과 1880년 사이에 대폭 수정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여러버전으로 존재합니다.

3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노바크 판'으로, 4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하스 판'으로 불립니다.

브루크너가 남긴 11개의 교향곡 중에서 이 곡은 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입니다.

일단 '낭만적'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친숙하게 끌어당깁니다.

브루크너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알기 쉬운 것"이라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하자면 좀더 발고 낙천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아울러 좀더 감각적이기도 합니다. 음의 빛깔은 선명하고 선율은 직접적인 호소력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복잡하고 거대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거나 접근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처음듣는 분들능 특히 1악장 시작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안개 속에서 여명이 밝아오는 느낌으로 시작합니다.

현악기의 트레몰로 속에서 호른이 주제 선율을 연주합니다.

이 주제 선율을 잘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전곡을 관통하는 모티브입니다.

아울러 금관악기들이 힘차게 연주하는 합창곡 분위기의 악구를 기억하면 됩니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들으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다보면 음악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리는 묘한 명상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아를 잠시 잊어버리고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과 비슷합니다.

혹은 음악으로 샤워를 한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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