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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야나체크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5. 8. 13:42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감독 필립 카우프만이 1988년에 만든 영화입니다. 다이넬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극중

배역인 토마스와 테레사로 나왔었습니다. 아마도 이 두 배우를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토마스와 테레사 뿐 아니라 사비나와 프란츠 도 중요한 등장인물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입니다.

원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입니다.

1968년 일어났던 '프라하의 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네 인물의 삶과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라하의 봄>은 처음부터 끝까지 체코의 음악가 레오시 야나체크의 음악들을 또 하나의 음악적 요소로

깔아놓고 있습니다. 여러장면에서 야나체크 음악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빈번히 등장하는 곡은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라는 피아노 음악입니다.

야나체크가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 후크발디를 회상하면서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낸 자전적 풍경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라고 할 만한 음악입니다.

매우 소묘적인 피아노 한 대로 기가 막힌 시적 미장센을 만들어내고 있는 음악입니다.

 야나체크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던 1901년부터 1908년 사이에 작곡했는데 1집은 10곡, 2집은 5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주로 애청되는 것은 1집인데 어떤 곡은 약 1분, 또 어떤 곡은 약 4분 정도로 전체

연주시간은 30분 가량입니다.

프라하의 봄을 만든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처음에는 베토벤의 음악을 OST로 쓰려고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베토벤의 음악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저자인 쿤데라가 좀더 가볍고 단순한 음악이 필요하다면서 야나체크 음악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대로 베토벤의 음악이 영화에 사용됐다면 지나치게 무거웠을 거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여전히 고전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베토벤의 음악이 이 영화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듭니다.

그에 비하자면 야나체크의 음악은 더욱 독백적이고 현대적인 느낌, 매우 간결하면서도 생략적인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쿤데라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영화에 사용하도록 권유한 데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쿤데라 본인이 야나체크의 음악을 매우 애호하기 때문입니다.

쿤데라는 더 나아가 야나체크의 음악을 자신의 '미학적 유전자'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그의 에세이 '만남'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각인되었는지를 나한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서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체코에서 나고자란 쿤데라에게 야나체크의 음악은 매우 중요한 예술적 자양분이었습니다.

그는 야나체크가 오랜 세월 살았던 브르노에서 1929년 태어났습니다.

야나체크가 세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였습니다.

체코 모라비아 지역 동북부의 후크발디에서 태어난 야나체크는 열한 살에 브르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 성가대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음악공부도 시작합니다.

이후에 브르노 사범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기도 합니다.

프라하와 라이프치히, 빈에서 지냈던 짧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생애 대부분을 브르노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쿤데라의 아버지인 루드비크 쿤데라가 바로 야나체크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브르노 음악원 원장을 지낸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였습니다.

쿤데라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소설가보다는 음악가를

꿈꿨습니다.  실제로 그는 피아노를 상당한 수준으로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쿤데라는 매우 음악적인 작가입니다. 특히 그는 야나체크의 음악에서 '생략의 미학'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읽는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쿤데라 소설의 난해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런 발언을 같은

인터뷰에서 하고 있습니다.

"생략기법은 반드시 필요해요. 그것은 항상 사물의 본질로 곧장 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제가 어렸을 때 부터 존경해온 작곡가 레오스 야나체크가 생각나는 군요.

그는 관현악을 위한 악보가 아무 필요도 없는 음표들의 부담에 짓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본질적인 무엇인가를 말하는 음표만이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소설도 이와 거의 비슷합니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의 1집은 10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화 프라하의 봄에는 2곡 '바람 따라 가버린 잎새', 4곡 '프리데크의 성모', 7곡 '밤인사',

10곡 '부엉이는 날아가지 않았어' 등이 등장합니다.

'바람 따라 가버린 잎새'는 가을을 소묘하는 한 편의 정갈한 시처럼 울려퍼지고, '프르데크의 성모'는

야나체크가 브루노 수도원의 성가대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부엉이는 날아가지 않았어'는 단순한 선율과 리듬을 반복하면서 어떤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또 영화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9곡 '눈물을 흘리며'도 많은 분들이 좋아할 만한 곡입니다.

선율은 단순하지만 가슴이 아릿한 애상감으로 충만한 음악입니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는 이렇듯이 쿤데라가 말한 생략과 압축의 아름다음을 느끼게 합니다.

피아노 한 대로 시적인 영상미를 펼쳐내는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야나체크는 성질이 굉장히 불같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야나체크의 사진에서도 그런 성품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은 1920년대에 촬영된 은발의 곱슬머리에 콧수염마저 하얀 말년의 모습입니다.

얼핏 봐도 성질 급한 노인네가 분명합니다.

물론 야나체크는 카메라를 다소 의식한듯 살짝 미소마저 머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볼수록 굉장히 자의식이 강하고 성격이 급한 예술가의 인상이 드러납니다.

청년시절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음악원에 유학했던 1879년 사진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는 얼굴에 살집이 없어

뾰족한 턱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결혼하기 직전이던 2년 뒤에 약혼녀 즈덴카 슐초바와 찍은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갸름하고 뾰족한 얼굴에 고집이 굉장히 세 보이는 곱슬머리 청년이 어딘가를 무표정하게 쏘아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했던 그는 말하는 속도도 아주 빨랐고 필체도 급하게 갈겨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또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있는 말을 돌직구로 쏟아내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그 독설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불화가 잦았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비평을 종종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과격한 독설이 문제가 되어 심지어 학교에서 잠시 쫓겨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후에도 그런 성격은 별로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차갑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모습보다는 불 같이 뜨거운 열정과

남을 의식하지 않는 고집 같은 것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는 체코의 선배 작곡가들인 스메타나, 드보르작 같은 이들보다도 민족적인 요소에 더욱 매달리면서

서유럽적인 것과 거리를 두려 했습니다.

라이프치히와 빈에서의 짧은 유학시절에 그가 확인한 것은 서유럽적인 것과의 불일치 혹은 갈등이었습니다.

곧바로 체코의 브르노로 돌아와서 거의 평생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아울러 작곡가로서의 그는 영감과 직관이 유난히 두드러졌던 음악가였습니다.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스타일에 가까웠습니다.

대개의 음악가들은 청년기에는 감성적이다가 점점 그런 측면을 의식적으로 절제하거나 자연스럽게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야나체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감성적인 음악을 구사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야나체크는 1881년에 즈덴카 슐초바와 결혼했는데 열한 살 연하였던 즈덴카는

원래 야나체크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학생이었습니다.

게다가 야나체크가 다녔던 브르노 사범학교 교장 에밀리안 슐츠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슐츠는 말하자면 야나체크의 은사였습니다.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들어갔던 것과 독일의 라이프치히로 유학갔던 것도 다 뒤에서 그가

돌봐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야나체크는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었기때문에 슐츠 선생이 대부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결국 1881년에 피아노를 가르치며 정이 들었던 그의 딸과 결혼해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체코는 오스트리아에게 지배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게르만주의에 저항하는 체코인들의 자각이 한창 번져가던 때였습니다.

슐츠 선생은 바로 독일-오스트리아 혈통의 사람이었고 그의 딸인 즈덴카는 유난히 독일적

정체성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체코에서도 상류층 언어로 통했던 독일어를 선호했고 일상생활에서도 독일적인 방식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야나체크는 모국의 음악적 전통, 특히 모국어의 억양과 리듬에 담딘 음악성에 매우 집착하는

작곡가 였습니다. 물론 그런 문화적 갈등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두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이

결혼초부터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혼 이듬해에 딸 올가를 낳고 잠시 별거했다가 재결합하고 1886년에 아들 블라디미를 낳았지만

두 살 대 아이가 사망하면서 부부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집니다.

사랑했던 딸 올가마저 1903년에 스물한 살로 세상을 떠나자 부부는 거의 남처럼 살게 됩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야나체크는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보다 서른 여덟 살이나 어린 카밀라 슈테슬로바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온천휴양지에서 1917년에 처음 만난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사실은 2년전에 이미 만난적이 있습니다.

1915년에 야나체크가 고향인 후크바르디를 찾았을대 유태인 골동품상의 아내였던 카밀라를 처음

봤던 것이지요. 아마 야나체크는 그 첫 만남에서 카밀라에게 반했을 겁니다.

하지만 야나체크는 그 순간의 감정을 애써 억눌렀을 겁니다.

아무리 그가 뜨거운 남자였다 할지라도 어느새 예순 살이 넘은 당시로서는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였기 때문일겁니다. 카밀라는 겨우 스물다섯 살, 게다가 이미 결혼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2년 뒤에 모라비아의 온천 휴양지 루하코비체에서 카밀라와 재회하면서 야나체크는

걷잡을 수 없는 연애감정에 빠져들고 맙니다.

사진으로 전해지는 카밀라의 외모는 즈덴카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즈덴카는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살집이 좀 있는 편인데비해 카밀라는 약간 마르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에 어딘지 집시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실제로 야나체크는 그녀를 집시소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이 휴양지에 각자의 공식적인 파트너와 함께 왔다는 것입니다.

야나체크는 즈덴카와, 카밀라도 자신의 남편과 같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재회 이후 야나체크의 가슴속에서 카밀라는 운명의 여인, 혹은 창작의 뮤즈로 자리합니다.

이 연애는 야나체크의 후반부 삶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야나체크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사랑에 빠진 그에게 카밀라는 음악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습니다.

이후 그는 말년의 전성기라고 부를 정도로 창작에 몰두합니다.

새로운 사랑에 빠져들면서 가장 먼저 썼던 곡은 그가 남긴 유일한 연가곡집 <어느 사라진 자의 일기>

였습니다. 집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을 읊고 있는 노래들입니다.

1921년에 완성한 비극적 오페라 <카티아카바노바>도 카밀라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밖에도 야나체크는 말년의 뮤즈로 부터 많은 영감을 받아 후반기의 걸작들을 속속 써냅니다.

그리고 1928년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카밀라에게 지그마치 700통이 넘는 사랑의 편지를 보냅니다.

 

생애 말년에 작곡한 두 곡의 현악4중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야나체크에게 가장 비중이 높은 음악적 장르는 오페라였습니다.

현악4중주는 딱 두 곡을 남겨 놓고 있는데 1번은 '크로이처', 2번은 '비밀편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두 곡 모두 카밀라와 열애에 빠져 있던 시기에 작곡됐습니다.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피아노곡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서>와 함께 배경음악으로 사용돼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진 곡들이기도 합니다.

표제가 암시하듯이 <현악4중주 1번 '크로이처>는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습니다.  야나체크는 악보에서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크로이처 소나타'는 어떤 소설일까요? 이 또한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음악애호가였던 톨스토이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에서 영감을 받아 쓴

중편 분량의 소설입니다. 

아내를 살해한 포즈드니셰프라는 남자가 기차에서 만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털어놓는 방식입니다.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종의 '불륜 치정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피아니스트인 자신의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 트루하체프스키와 베토벤의 소나타를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같은 질투에 사로잡힙니다.

두 사람이 음악으로 맺어진 음욕의 관계라고 확신하고는 결국 아내를 살해합니다.

야나체크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아내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던 듯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카밀라를 소설 속의 여주인공과 동일시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카밀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 등장하는

고통받고 아파하며 쓰러져가는 가련한 여인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현악4중주 1번 크로이처>는 말년의 작품답지 않게 감성적이고 격렬합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한데 어울려 비감한 분위기의 짧은 선율을 연주하면서 1악장을 시작합니다.

이어서 첼로가 춤곡풍의 리듬을 연주하면서 따라붙습니다.

이 두 개의 선유을 교차시키고 변형하면서 1악장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딘지 불길한 느낌이 감도는 격렬한 선율 때론 지치고 힘든 표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2악장은 바이올린이 집시풍의 노래를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그 노래가 점점 어두워지면서

비올라와 첼로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배경으로 깔립니다.  집시풍의 노래가 느림과 빠름을

반복하는 동안 첼로가 불투명한 음향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3악장에서는 아름다운 노래와 격렬한 괴성이 뒤섞입니다. 마치 아름다운 노래를 방해하려는 듯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어울려 그로테스크한 음향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다가 애매모호한

마침표를 찍으면서 3악장 연주가 끝납니다. 야나체크의 현악4중주를 일컬어 "표현주의의 정수"

라고 표현했던 쿤데라의 언급이 떠오르는 악장입니다.

이어지는 4악장은 느린 호흡으로 시작합니다. 1악장에서 들었던 선율이 다시금 얼굴을 드러내며

변주되고 피치카토와 분절적인 음형들이 가세하면서 음악이 점점 불길하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불안하게 허공을 떠돌던 음형들이 다시 편안한 호흡으로 돌아오면서 곡을 마무리합니다.

야나체크는 또 하나의 현악4중주곡인 <2번 '비밀편지>를 생애 마지막 해인 1928년에 작곡합니다.

말 그대로 카밀라와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담아낸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야나체크의 법적인 아내 즈덴카와 카밀라의 남편조차도 둘의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야나체크의 가슴 속에서 카밀라와의 열애는 '비밀스러운 것'이었나 봅니다.

야나체크는 <현악4중주 2번 비밀편지>를 작곡하면서 "나는 뭔가 좋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이 거기 담겨 있다" 라고 카밀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같은 해에 그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바탕을 둔 마지막 오페라 <죽은 자의 집으로부터>를

작곡하고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고향인 후크바르디의 작은 집에서 카밀라와 그녀의 아들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화근이었다고 합니다.

향년 74세. 카밀라는 그로부터 7년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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