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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리스트 - 사랑의 꿈

돌아온아톰 2017. 4. 28. 13:13

작가 안데르센은 30대 중반에 긴 여행길에 오릅니다.

1840년 10월31일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출발해서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스를 거쳐 중동지역까지

건너갑니다.

이후에 오스트리가 빈을 통해 덴마크로 다시 돌아오는 9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여행에서 겪은 일들과 보고 들은 것들을 2년 뒤에 책으로 펴냅니다.

'시인의 시장' 이라는 여행기인데, 그 여행기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도시는 독일 함부르크입니다.

코펜하겐에서 출발한 지 엿새 뒤인 11월5일, 안데르센은 함부르크의 슈타트 론돈 호텔에 있었습니다.

사실 안데르센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그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을 찾아갔던 까닭은 리스트의 연주회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들이 뒷계단을 통해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제일 좋은 자리로 나를 안내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리스트가 당대의 피아노 비르투오조로 등장한 시기는 1830년대였습니다.

여행길에 나선 안데르센이 소문으로만 듣던 리스트의 연주를 실연으로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세월이 흘러서였습니다. 리스트가 스물 아홉 살 때입니다.

안데르센의 기록에 따르면 "홀은 순식간에 초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안데르센도 그날 현장에서 매우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문장들, 예컨대 "리스트는 연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청중을 흥분시켰다" 라든가,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 한줄기 전류가 홀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는 구절들에서 안데르센 본인이 느꼈을

흥분감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그는 그날 리스트의 연주를 '음악의 바다'에 비유합니다.

"피아노 한 대가 하나의 완벽한 오케스트라로 변해 버린 느낌"

"광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숙련된 열 손가락, 위대한 천재의 손가락..." 같은 어찌보면 허황되기까지 한

극단적 찬사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튀어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의 이 여행기는 당대에 리스트의 인기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특히 연주회장에 모여든 여성들로부터 얼마나 큰 열광을 받았는지를 문학가적인 필치로 생생히 보여줍니다.

"리스트가 연주를 마치자 사방에서 비 오듯 꽃다발이 날아들었다. 예쁘고 젊은 여자들과,

한때 예쁘고 젊었을 노부인들이 저마다 부케를 던졌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1811-1886))는 헝가리의 도보르얀(Doborjan)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지명이 라이딩(Raiding)으로 바뀌었고, 오스트리아 영토로 편입돼 있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는 이곳에서 아마추어 첼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직업 연주자로 자리를 잡을 만한 실력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의 생업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집사였습니다.

그러니까 하이든이 30년 가까이 음악 하인으로 봉직했던 바로 그 에스테르하지 가문입니다.

헝가리에서 세력이 등등했던 아주 유명한 귀족 집안이었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그 집안의 일을 돌보던 하인들 중 비교적 '고위직'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지주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덕분에 어린 리스트는 꽤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도보르얀 지역에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부농'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리스트는 아들을 유명한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첼리스트의 꿈이 좌절된 아버지, 사는 것은 제법 풍족했지만 신분은 그저 하인에 머물렀던 그는

아들의 음악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집안에서조차 헝가리어를 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아마 독일-오스트리아를 향한 문화적 지향이 유난히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독일계 여성 안나 라거(리스트의 모친)와 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일설에는 리스트 집안이 집시의 혈통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아버지는 리스트를 데리고 훌륭한 선생들(체르니, 살리에리 등)을 찾아다녔고 마차를 달려

곳곳에서 순회연주를 펼쳤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입니다.

리스트가 열두 살 때 베토벤 앞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소년의 연주에 완전히 감탄한 베토벤은 연주가 끝나자 소년을 꼭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그 장면은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합니다.

열두 살의 리스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스트리아 빈을 찾아와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이 제자의 청을 받아 신동의 연주회에 참석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에도 어린 연주자들이 거장 앞에서 오디션을 보기위해 줄을 서는 광경들은 흔합니다.

리스트의 스승이었던 체르니는 제자에 대한 첫인상을 "창백하고 병약하다" 거나

"피아노를 술 취한 듯 두들겨대던, 손 모양에도 문제가 있는 아이"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천부적인 재능, 그 중에서도 특히 "엄청난 즉흥연주"에 대해서는 스승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나 봅니다.

체르니는 리스트를 2년 동안 가르친 다음, 1822년 12월에 빈에서 데뷔 연주회를 치르게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리스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프랑스 파리로 건너갑니다.

이른바 리스트의 '파리시절'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리스트가 열여섯 살이던 1827년에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의 음악교육에서부터 일상생활에 대한 점검까지 도맡았던, 연주와 관련해서는 매니저

역할까지 담당했던 아버지가 사라지면서 리스트는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아직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파파 보이'로 살다시피 했던 그는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방황의

시기를 보냅니다.

물론 연주자로서의 인기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신들린 비르투오조(virtuoso:명연주자)의 소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리스트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점점 유명 인사가 됐을 뿐만 아니라 스무 살 무렵부터 베를리오즈,

쇼팽, 파가니니 등과 교유를 시작하면서 일급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운명의 여인을 만납니다.

말하자면 리스트의 '파리시절'을 상징하는 연애 사건이 터졌던 것이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아들이 여자들에게 휘둘릴 것을 우려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그 우려가 현실이 된 셈입니다.

리스트는 스물세 살 때 7년 연상의 유부녀 마리 다구 백작부인을 만납니다.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와 더불어 화제의 중심이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리스트는 그 여인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떠돌며 사랑의 도피행각을 펼칩니다.

둘은 세 명의 아이까지 낳습니다.

그 중 두 아이는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지만, 둘째 딸 코지마(Cosima Liszt(1837-1930)는

리스트를 열렬히 존경했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가 됩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코지마는 훗날 남편 뷜로의 곁을 떠나 자신의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은

바그너와 함께 삽니다.

이렇듯 상식을 벗어난 예술가들의 열애는 당대 유럽 사회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근대와 계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자유를 향한 희구와

낭만적 방랑,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표출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습니다.

 

리스트의 음악에는 낭만적 광기와 마음에 파고드는 시정,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는 열정, 19세기 나름의 도회적인 세련미 같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으로 부터 이어져온 음악적 유산, 아울러 파가니니로부터 받은 자극과 영감 같은 것들이

한데 녹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리스트의 음악에는 그 자신의 생애가 그랬던 것처럼, 관능과 경건함이 뒤섞에 있습니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그것 때문에 리스트는 오래도록 칭송과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바람둥이 리스트'와 훗날 신부가 되는 '성직자 리스트'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불꽃은 유한한 것이었습니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은 1844년에 결별합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진 것은 아닐겁니다.

세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점점 사랑이 식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파리 예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두 사람의 열애는 그렇게 10년을 채 못넘기고 끝이 납니다.

이후 리스트는 많은 여자들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정확히 말해 1847년에 리스트는 두 번째 운명의 여인과 조우합니다.

우크라이타 키예프의 귀족이었던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리스트의 두 번째 사랑이었습니다.

공작부인은 키예프를 찾아온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한눈에 반해 버렸던 모양입니다.

남편과 별거 중이던 그녀는 리스트가 있는 독일 바이마르까지, 그 머나먼 길을 딸까지 데리고 달려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막강한 낭만'이 존재했던 시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용감한 여인은 '파리 사교계의 꽃'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여인이었다고합니다.

백작부인은 장미처럼 화려했지만, 카롤리네는 지성과 교양이 넘치는

차분한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감독직을 수락하면서 유럽 곳곳을 바람처럼 떠돌던 삶을 정착하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카롤리네도 리스트에게 "이제 피아노 연주를 줄이고 작곡에 전념하세요"라고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난 이듬해인 1848년에 리스트는 바이마르 알텐부르크에 집을 마련합니다.

카롤리네는 남편인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법적으로 이혼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바이마르로 와서

리스트를 내조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법적인 남편과 끈질긴 이혼 투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공작이 세상을 떠난 1864년에야 이혼이 성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리스트와 그녀가 이후에 법적인 부부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 무렵에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친구에 가까웠다고 전해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리스트는 1865년에 신부(神父)가 되어 성직자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랑을 만났던 바로 그 무렵에 리스트는 3곡의 가곡을 씁니다.

'테너 또는 소프라노를 위한 3개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1곡 <고귀한 사랑>(Hole Liebe),

2곡 <가장 행복한 죽음>(Seliger Tod), 3곡<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O lieb, so lang lieben du kannst)를

작곡했습니다.

시인 프라일 리히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입니다.

그리고 리스트는 3년 뒤인 1850년에 이 세 곡의 가곡을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해 '3개의 녹턴' 이란

제목을 붙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세 번째 곡인 <녹턴 3번 A플랫장조 op.64-3>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리스트의 작품 가운데 <헝가리안 랩소디 2번>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흔히 '사랑의 꿈'(Liebestraum)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원래의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입니다.

리스트가 두 번째 사랑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원곡의 가사를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시간이 오리라, 시간이 오리라/그대가 무덤 옆에서 슬퍼할 시간이 찾아오리라'

 

 

추천 음반을 보면,

1. 슈라 체르카스키 (1960년대. Decca) 음반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 태생의 슈라 체르카스키는 국내에서 과소평가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명입니다.

낭만성의 극점을 보여 주었던 그의 피아니즘은 역시 낭만주의 계열의 레퍼토리에서 빛납니다.

예컨대 쇼팽, 리스트, 리흐마니노프 등의 음악입니다. 개성이 넘치는 루바토,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즉흥성이 듣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국내에서 구하기가 어렵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음반입니다.

 

2. 호르헤 볼레트 (1982년. Decca) 음반이 있습니다.

쿠바태생의 피아니스트 호르헤 볼레트는 역시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릴 만합니다.

그는 1980년대에 데카에서 리스트의 작품 전곡을 녹음했습니다.

그가 연주하는 <사랑의 꿈>은 강렬한 서정을 보여주면서도 안정감을 잃지 않습니다.

리스트의 다른 곡을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칫하면 리스트적 강렬함이 과도해 질 수 있지만,

볼레트는 언제나 안정적인 연주를 펼쳐냅니다. 클라우디오 아라우와 쌍벽을 이루는 리스트 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주 스타일과 음색이라는 측면에서 리스트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추천할 만한

음반입니다.

 

3. 예브게니 키신 (2010년. Sony Music) 음반이 있습니다.

리스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발매됐던 음반입니다. 'Kissin Plays Liszt'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습니다.

앞서 추천한 볼레트와 비한다면 현대적이고 과감합니다. 강약과 완급의 대비가 확연한데다,

음 하나하나를 핀셋으로 뽑아 올리는 듯한 정확한 타건이 일품입니다.

템포는 전반적으로 약간 빠릅니다. 하지만 음색은 어두운 정열을 느끼게 합니다.

어떤 이들은 키신의 연주가 차갑고 기계적이라면서 회피하기도 하지만, 2000년대에 녹음된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 중에서 단 한 편을 골라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역시 키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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