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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헨델 - 수상음악

돌아온아톰 2017. 4. 28. 13:09

헨델의 '수상음악'은 1717년 7월 17일 영국 템즈 강에서 열린 국왕의 연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바로크 시대를 수놓았던 세 명의 거장이 동갑내기였습니다.

바로 바흐와 헨델, 그리고 또 한 명은 이탈리아 태생의 음악가, 특히 하프시코드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1685-1757))입니다.

세 명은 모두 1685년에 태어났습니다.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았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헨델은 20대 중반에 런던에 정착해 40대 초반이었던

1727년에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스카를라티는 로마에서 활약하다가 포르투갈 리스본의 궁정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공주의 음악선생으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 공주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4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자 자신도 스페인 궁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결국 마드리드에서 타계하게 됩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1685-1759, 영국으로 귀화해서는 조지 프레드릭 헨델))의 삶은

여러 측면에서 동시대의 음악가 바흐와 대비됩니다.

간단히 말해 바흐가 정주민적인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해, 헨델의 생애는 매우 유목민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헨델은 독일 작센 지방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습니다.

바흐의 출생지인 튀링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입니다.

북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존 바비롤리(John Barbirolli(1899-1970))가 지휘했던 할레 오케스트라의 거점으로 잘 알려져있는,

독일 중부의 공업도시입니다.

헨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이자 이발사였다고 합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직업이 외과의사 겸 이발사였던 것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이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하는 일이 흔했던 모양입니다.

헨델의 삶을 들여다볼라치면 '고향을 떠나다'라는 것이 '아버지를 벗어나다'와 거의 동의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헨델은 어린시절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탐탁치 않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으로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헨델의 속마음은 음악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는 열여덟 살에 고향에 있는 할레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를 제안 받지만 그 자리를 뿌리치고 북부 독일의 음악

중심지인 함부르크로 갑니다.

법률가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그렇게 한 발씩 벗어났던 것입니다.

물론 그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헨델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워나갑니다.

스무 살이던 1705년에 함부르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 <알미라>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번에는 아예 시선을

이탈리아 쪽으로 돌립니다.

당신의 이탈리아는 한마디로 유럽 음악의 종주국이었습니다.

특히 극음악(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본향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이 두 개의 장르가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곳곳으로 퍼져가면서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헨델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구축했을 것입니다.

같은 독일 태생인 바흐와 확연히 구분되는, 오히려 이탈리아풍에 가까운 헨델의 음악이 이 시기에

잉태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많은 음악가들과 교류를 시작했을 무렵에 헨델은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습니다.

1706년 부터 1709년까지 였습니다.

헨델은 바로 그 시기에 화려하게 약동하는 리듬과 화성을 자신의 음악 스타일로 구축합니다.

그런데 이 리듬과 화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헨델은 바흐와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 줍니다.

바흐의 화성은 독일적이지만 무겁고 어두운 편입니다.

반면에 헨델의 화성은 밝고 환합니다. 게다가 이탈리아풍의 출렁거리는 리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화려하게 약동하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특히 현악 파트가 간결하면서도 힘찬 화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헨델 음악의 특징으로 손꼽힙니다.

왕과 귀족들의 흥취를 고조시키기에 이만한 음악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헨델은 그렇게 자신의 뿌리인 독일풍의 음악과 상당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헨델은 기본적으로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에 주력했던 음악가였습니다.

'극음악'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그 두 개의 장르가 당대 음악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헨델이 작곡한 오페라는 모두 46곡, 오라토리오는 32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장르에서 헨델이 써낸 아리아들의 서정성과 성악적인 기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의 오페라는 오늘날 국내에서 전막(全幕)으로 공연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라는 아리아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라토리오로는 그 유명한 <메시아>가 대표적입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HWV. 348-350))은 <왕궁의 불꽃놀이>와 더불어 헨델의 관현악 모음곡을 대표합니다.

 

(여기서 잠깐, <왕궁의 불꽃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HWV.351)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곡은 <수상음악>과 함께 헨델의 관현악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1748년 10월 아헨(엑스라샤펠)평화조약을 체결합니다.

해상의 주도권을 다투던 이 전쟁의 승자는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의 왕 조지2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불꽃놀이를 계획했고, 헨델에게 행사용 음악을 작곡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조지2세는 "관악기만을 사용하라"는 단서를 달게 됩니다. 현실주의자였던 헨델은 적어도 겉으로는

왕의 명령을 따랐고, 덕분에 이 곡은 유례없는 관악기 편성을 보여줍니다.

오보에,파곳,호른,트럼펫 등 54개의 관악기와 3개의 티파니를 배치합니다.

게다가 초연때 좀더 화려한 음향을 뿜어내기 위해 100개의 관악기가 동원됐다고 전해집니다.

애초에 악보에 표시된 것보다  두 배에 가까운 증원이었습니다.

조지 2세가 계획했던 불꽃놀이는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파크에서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이곡의 실제 초연은 그보다 며칠 전 복스홀 공원에서 있었던 리허설에서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날 리허설은 대대적인 관악기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구경하려는 관객들로 대혼잡을 이뤘습니다.

복스홀 공원에 모여든 관객들이 자그마치 1만 2,000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바람에 "런던 브리지에 3시간이나 마차 한 대가 다닐 수 없었다"고 당시 신문은 기록하고 있죠.

4월 27일의 불꽃놀이 행사에서 이 곡이 제대로 연주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서곡이 연주된 직후 엄청난 폭죽들이 잇따라 발사되면서 막이 올랐지만 결국에는 불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행사장은 난장판으로 변했다고 전해집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관악기만으로 <왕궁의 불꽃놀이>를 작곡했던 헨델은 불꽃놀이 소동이후에 이 곡의 악보를

급히 손질합니다.

현악기까지 추가된 콘서트 버전으로 보완해 며칠 후 고아원을 위한 자선음악회에서 연주합니다.

불꽃놀이 행사에서 연주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판본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왕궁의 불꽃놀이>는 이밖에도 여러 판본이 존재합니다.

여러 지휘자들이 이 곡을 나름대로 편곡해 연주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수상음악>을 편곡하기도 했던 아일랜드의 지휘자 해밀터 하티의 버전이 유명합니다.)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헨델은 1710년 6월에 독일로 돌아와 독일 하노버 궁정의 악장으로 일하게 됩니다.같은 해에 1년간의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이때 영국에서 공연했던 오페라 <리날도>가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물론 헨델은 휴가기간을 어기지 않고 자신의 고용주였던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選帝候)곁으로 일단 돌아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성공과 환대가 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나 봅니다.

자신이 예속돼 있는 하노버 궁정은 영국에 비한다면 오페라의 인기가 시들했기 때문입니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헨델은 1712년에 다시 한 번 게오르그 선제후에게 허락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앤(Anne(1665-1714)여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음악가로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앤 여왕이 1714년에 사망합니다.

그 자리를 이은 사람이 하필이면 헨델의 고용주였던 하노버의 게오르그 선제후였습니다.

영국 왕 조지 1세(George 1(1660-1727)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거의 200년 가까이 유지됐던 영국 하노버 왕가의 시조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부터 <수상음악>을 둘러싼 하나의 설(設)이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똥줄이 탄 헨델이 1717년 여름에 템즈 강에서 국왕이 뱃놀이 연회를 벌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국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상음악>을 작곡해 템즈 강에서 초연했다는 설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그저 떠도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어쨌든 <수상음악>은 1717년 여름, 조지 1세의 템즈 강 연회에서 초연됐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야외 음악회였습니다.

헨델과 약 50명의 악사들이 배에 오른 채, 왕과 귀족들이 탄 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강에서 연주했던 까닭에 호른이나 트럼펫 같은 관악기들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집니다.

그래야 음악 소리가 제대로 들렸을 겁니다.

기록에 따르자면 그날 국왕은 음악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면서 모두 세 차례나 연주를 지시했다고 전해집니다.

<수상음악>은 크게 보자면 모두 3곡으로 이뤄진 모음곡입니다.

왕과 귀족의 야외 연회에서 연주된 행사용 음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헨델의 특징인 밝고 화려한 화성과

출렁이는 리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좋습니다.

제체 3곡 중에서 '모음곡 F장조 HWV.348'은 11곡(악장)으로 돼 있습니다.

각각의 악장은 '서곡/아다지오와 스타카토/알레그로-안단테-알레그로 다 카포/미뉴에트/에어/미뉴에트/부레/

혼파이프/알레그로/알레그로/알라혼파이프'로 이뤄져 있습니다.

서곡은 장중하게 시작했다가 중반부에서 템포가 확연히 빨라지면서 경쾌해집니다.

이탈리아풍의 현악 합주가 힘차고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두 번째 악장 '아다지오와 스타카토'에서 느리고 애달픈 느낌을 잠시 표현하다가 세 번째 악장으로 넘어가면서

다시 밝고 힘찬 분위기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느림과 빠름을 반복하면서 음악이 흘러갑니다.

그러다 11번째로 등장하는 '알라 혼파이프'로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습니다.

아마도 이 곡이 <수상음악>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곡일 듯합니다.

'alla'는 '-풍으로'라는 뜻입니다.

혼파이프는 악기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로네상스 시절부터 이어져온 춤곡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알라 혼파이프'란 '혼파이프 춤곡풍으로'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곡인 '모음곡 D장조 HWV.349'는 '서곡/알라 혼파이프/미뉴에트/렌토/부레'로 이뤄져 있습니다.

또 마지막 곡인 '모음곡 G장조, HWV.350'은 '알레그로/리고동/알레그로/미뉴에트/알레그로'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지만 헨델의 <수상음악>은 여러 판본이 존재합니다.

오늘날의 실연(實演), 혹은 음반에서는 앞서 언급한 순서를 고스란히 따르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헨델의 음악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음반을 추천해 드립니다.

 

1. 조지 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61년. Decca) 음반입니다.

 

헨델이 당대에 추구했던 화려함을 현대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연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화려한 스펙터클을 펼쳐냅니다.

시대악기로 이뤄진 고졸한 연주를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LP시절부터 수많은 애호가들에게는 사랑받았던 명연입니다.

헝가리 태생의 지휘자 조지 셀은 미국으로 건너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했지만,

생애 후반부에는 유럽의 여러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숱한 명연을 남겼습니다.

이 음반은 그중 하나입니다. 영국의 지휘자 해밀턴 하티가 현대 관현악을 위해 편곡한 버전으로 연주합니다.

 

 

2. 존 엘리엇 가디너,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1983년. Philips)

 

시대악기를 사용했음에도 절도있고 힘찬 사운드를 들려줍니다.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진행이 무엇보다 돋보이는데, 이런 방식이야말로

헨델의 의도에 충실한 연주일 가능성이 높죠.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상음악>의 판본들이 여럿이고 때때로 생략해서 연주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존 엘리엇 가디너는 전곡을 모두 연주함으로써 원전에 대해 충실한 입장을 거듭 드러냅니다.

고악기는 힘이 달릴 것이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불식시키는 연주입니다.

팽팽한 긴장감, 날이 선 연주가 압권이라 하겠습니다.

 

 

3. 조르디 사발, 르 콩세르 데 나시옹(1993년. Alia Vox) 음반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시대악기 연주자 조르디 사발과 그가 이끄는 르 콩세르 데 나시옹이

1993년 3월 카탈루냐의 카르도나 성에서 녹음한 연주입니다.

2008년에 리마스터링해 SACD(super audio compact disc)로 재출시 됐습니다.

시대악기 특유의 고풍스러운 맛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는 연주입니다. 우아하고 탐미적인 느낌을 전해주죠.

애초에 헨델이 가졌던 작곡 의도에 충실한 연주라기 보다는 사발 특유의 해석으로 음악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다는

측면이 강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보자면 그것이 바로 이 녹음의 가치라고 할 수 있죠.

프랑스에서 디아파종 황금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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