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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슈만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4. 28. 12:56

어린시절의 슈만은 문학적 재능이 빼어났던 소년이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자서전을 쓰기도 했고, 김나지움 마지막 학년(우리로치면 고등학교 3학년)에는

'시와 음악의 밀접성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학적 재능은 아마도 부친에게서 이어진 것으로 유추됩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슈만의 고향인 츠비카우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출판업을 했습니다.

그뿐만아니라 번역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외국의 시인들, 예컨대 영국 시인 바이런의 작품을 번역해 독일에 소개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1810년에 다섯 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슈만은 늦둥이였는데, 아버지는 이 아들을 유독 곁에 두고

예뻐했다고 합니다. 늦둥이여서고 그랬겠지만 막내가 보여준 문학적 재능 때문이기도 했을겁니다.

슈만은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부터 아버지의 서점에서 출판을 위한 교정을 본다거나,

일부 항목을 집필하기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슈만은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재능과

꿈을 한층 더 키워나갔습니다.

1828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슈만이 뮌헨으로 가서 시인 하이네를 만난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적어도 이 시절의 슈만은 시인을 꿈꿨던 문학청년이었다고 봐야겠습니다.

당시 하이네는 열한 살 연하의 슈만을 냉랭하게 대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슈만에게 시내 곳곳을

안내해 줬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편들이 아직 앳된 얼굴의 그 청년에 의해 아름다운 노래로 거듭날 것이라고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슈만은 훗날 하이네의 시를 가사로 삼아 <리더크라이스>,<시인의 사랑>같은 가곡을 작곡합니다.

슈만은 문학적 재능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재능과 꿈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남긴 글에 의하면 일곱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쳤다고 합니다.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로 진학해서는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합니다.

1년뒤 하이델베르크 대학 법학과로 옮기는데, 이곳에는 안톤 티보라는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법학자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음악평론가로도 활약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집에서는 종종 음악회가 열렸는데 슈만은 그 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이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라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에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가 그의 집에서 연주되고,

그가 피아노로 반주할때 내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이 두 명의 스승인 비크와 티보는 슈만의 음악적 생애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티보는 슈만에게 "법학보다는 음악을 하는게 어떻겠나"라고 권했습니다.

슈만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고향집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에게 당장 편지를 씁니다.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굳히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긴가민가 싶었을 겁니다.

막내아들이 음악가로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을 겁니다.

슈만도 어머니의 그런 우려를 의식했는지 "프리드리히 비크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보세요"라고 말합니다.

결국 비크가 망설이던 어머니에게 쐐기를 박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3년 안에 유능한 피아니스트로 키워내겠다" 고 호언장담했던 것입니다.

 

슈만은 하이델베르크를 1년 만에 떠나 라이프치히로 되돌아 옵니다.

그때부터 비크의 집에서 제자로 거주합니다.

이때부터 비크의 딸인 클라라와의 인연이 깊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슈만이 <교향곡 1번 B플랫장조>를 썼던 때는 31세였던 1841년입니다.

말하자면 클라라와 결혼한 이듬해였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스승 비크는 자신의 딸과 슈만이 결혼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사실 이해가 갈 만한 부분입니다.

비크가 슈만을 자신의 집에 거주하게 한 이후, 스승은 당연히 제자의 이상성격, 혹은 조울증 같은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비크의 주장에 따르면 슈만을 음주벽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슈만은 스물두 살이었던 1832년에 오른손 손가락을 다쳐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스승이 보기에는 음악가로서의 장래마저 불투명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슈만은 법정 투쟁 끝에 클라라와의 결혼에 마침내 성공합니다.

슈만은 서른 살이었고 클라라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당시 슈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수많은 사랑의 발라드를 작곡한걸 보고 짐작이 가능합니다.

결혼한 그해에 <리더크라이스>,<미르테의 꽃>,<시인의 사랑>,<여자의 사랑과 생애> 등 많은 가곡을

작곡했고 이듬해에 <교향곡 1번>을 작곡하고 <교향곡 4번>의 초고를 씁니다.

규모가 작은 교향곡이라할수 있는 <서곡, 스케르초와 피날레>도 이해에 작곡합니다.

그래서 1840년을 '가곡의 해'로 또 1841년을 그와 대비시켜 '교향곡의 해' 라고 부릅니다.

슈만은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1853년 9월30일, 슈만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스무 살 청년 브람스의 연주를 듣고 진심으로 탄복합니다.

그날 일기장에 "천재가 다녀갔다"고 쓴 것을 물론이거니와, 잡지 '음악신보'에 생면부지의 청년을

열렬히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브람스가 잘되길 기원합니다.

슈만은 동갑내기 음악가 쇼팽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슈만이 쇼팽의 자작곡 악보를 처음 접한 것은 1831년이었는데, 그때도 슈만은 자신의 스승 비크에게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고 합니다. "당장 이 사람을 불러와 클라라와 함께 피아노를 공부하게 하세요"

자신도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면서도 경쟁과 질투심을 갖기보다는 훌륭한 음악가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환호하는것, 그것을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슈만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간사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장작 자신과는 타협하거나 절충하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그의 정신을 옥죄었던 갖가지 불안증, 환청과 환각, 급기야는 라인강에 몸을 던질 정도로

심해진 우울증은 결국 슈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슈만의 정신병 증세는 집안내력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슈만의 아버지는 오래도록 신경쇠약을 앓다가 182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에 슈만의 손윗누이인 에밀리에도 자살했습니다.

슈만이 열여섯 살이 되는 때의 일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자면 슈만은 스물 세살이던 1833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증세를 한두 가지로 특정하기가 어려운, 아주 복합적인 증세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고소공포증을 앓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노상 시달렸습니다.

죽은 아버지가 눈앞에 보인다고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귀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슈만의 귀에는 A음의 환청이 계속 들렸다고 합니다.

불면과 두통도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던 무렵에 슈만이 처해 있던 상황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좋아했던 큰형 율리우스와 형수의 죽음입니다.

세 번째는 음악평론가로서의 삶을 계획하면서 잡지 '음악신보'의 창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슈만은 좌절과 슬픔에 빠진 채 불안증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그와 동시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일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음악평론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오이제 비우스'였고 또 하나는 '플로레스탄'이었습니다.

오이제비우스는 명상적이고 우울한 인물, 그러니까 우울증에 시달리는 인간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플로레스탄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 즉 조증에 휘들리는 인간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슈만은 극단적인 조울증 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상반된 캐릭터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렇게 분열된 자아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이라는 캐릭터는 슈만의 피아노곡 <사육제 op.9>에도 등장합니다.

실재인물과 가공인물들을 음악으로 묘사하면서 흥겨운 무도회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는 곡인데

모두 21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중에서 5곡이 '오이제비우스', 6곡이 '플로레스탄'입니다.

그렇게 정신질환에 거의 평생 시달렸던 슈만에게도 꿈처럼 달콤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승이었던 비크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딸인 클라라와 결혼했을 때였습니다.

두 사람은 약 5년간의 열애 끝에 1840년에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해에 슈만은 자그마치

약 140곡의 가곡을 일사천리로 작곡합니다.

정말 엄청난 생산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슈만의 생애에서 1840년을 '가곡의 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폭풍같은 에너지의 반대편에는 '완전한 무기력'이 있었습니다.

즉, 열에 들떠서 열정적으로 곡을 써내려가는 슈만의 반대편에는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멍 때리고 있던

슈만도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슈만은 그렇게 극단적인 열정과 우울 사이를 오가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슈만의 이중성, '오이제비우스' 와 '플로레스탄' 이었습니다.

 

1840년에 작곡된 슈만의 가곡들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걸작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곡들 붙인 <시인의 사랑>은 슈만의 가곡집 중에서도 단연걸작으로 꼽힙니다.

모두 16곡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 9월12일 이었는데, 이 가곡집은 그보다 약 4개월 전에 작곡됐습니다.

9일만에 일사천리로 쓰였다고 하는데, 슈만은 이번에도 역시 열에 들뜬 모습으로 클라라에게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웃다가 울다가 하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선율과 반주는 나를 미치게 합니다.

하지만 클라라! 노래를 만든다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16곡 중에서 첫 곡은 '아름다운 5월'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유명한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5월, 꽃들이 피어날 때 내 마음에는 사랑이 싹튼다네.

아름다운 5월, 새들이 노래할 때 나는 그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한다네"

이렇듯이 이 가곡집에는 클라라와의 사랑에 들뜬 슈만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아울러 슈만은 이 가곡집에서 피아노의 위상을 한층 더 끌어올립니다.

단순한 반주라기 보다는 하나의 연주로 격상시킵니다.

그래서 이 가곡집은 '노래와 피아노의 이중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신적 분열, 혹은 조울은 슈만의 음악을 이해하는 통로 중 하나입니다.

<교향곡 1번 B플랫장조>도 그렇습니다. 이교향곡은 '봄'이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트럼펫과 호른의 팡파르로 시작하는 1악장은 처음부터 무겁고 느립니다.

'봄이 왔다'라는 암시로는 왠지 부적절해 보이는 이 불안한 팡파르는 1악장이 끝날때까지 여러차례

반복됩니다.

가끔 목관악기들, 특히 플루트가 앞으로 나서며 봄날의 새소리를 연상케하는 악구를 연주하지만

그 새들의 지저귐마저 이내 사그라지고 다시 어두운 팡파르가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이어서 라르게토로 느리게 흘러가는 2악장은 슈만의 '봄'에서 가장 로맨틱한 악장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이로맨틱은 우아함이나 사랑스러움 보다는 어딘지 쓸쓸한 비애가 정서를 풍깁니다.

아타카로 중단없이 이어지는 3악장 스케르초에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고, 마지막 4악장에서

햇살처럼 잘게 부서지는 음표가 잠시 고개를 내밀지만 이 역시 관현악 총주의 무거운 기세에 눌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슈만은 '마음의 병'을 끝내 치유하지 못했습니다.

44세에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가 지나가던 배에 간신히 구조됐지만, 46세에 엔데니히 정신병원에서

눈을 감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찾아온 아내 클라라에게 "알겠어"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슈만은 본 교외의 묘지에 묻혔고, 아내 클라라도 40년 뒤에(1896년) 옆자리에 누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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