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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멘델스존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4. 28. 12:54

멘델스존의 풀네임은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cob Ludwig Felix Mindelssohn Bartholdy)

입니다.

이렇게 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Abraham Mendelssohn)이 유대교에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멘델스존은 7살이 되던 1816년에 세계를 받는데, 이때 '바르톨디'라는 세례성(姓)까지 더해지게 됩니다.

바르톨디는 그의 외삼촌 야코프가 소유하고 있던 성(城)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펠릭스은 외삼촌의 영지이름을 성씨로 삼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펠릭스보다 네 살 위의 누나 파니, 두 해 뒤에 태어난 누이동생 레베카, 막내인 남동생 파울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펠릭스에게 '멘델스존'이라는 성을 쓰지 말고 '바르톨디'로 쓰도록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펠릭스는 죽는 날까지 본래의 성을 병기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후대 사람들은 펠릭스 멘델스존을 온건하고 부드러운 모범생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지만,

알고 보면 은근히 고집쟁이였던 모양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멘델스존의 집안은 속된 말로 '빵빵한 가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당대의 존경받던 계몽주의 철학자였습니다.

볼품없는 외모에 곱사등이 장애까지 지닌 인물이었는데, 독일의 극작가의 시극 <현자 나탄>의

실제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극 속의 나탄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종파와 민족을 초월한 사랑을 설파하는 인물입니다.

말 그대로 현자(Weise)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명망높은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함부르크의 경제권을 쥐락펴락하던

은행가였습니다.

펠릭스가 태어나고 4년 뒤 베를린으로 이사해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 금융계의 거물이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와 아버지 외에도, 멘델스존 집안에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유명인사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교육도 최고로 받았을 겁니다.

게다가 멘델스존은 어린시절부터 천재성이 빛을 발했습니다.

이미 열 살 무렵에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 시인 오비디우스의 책을 원어로 읽었다고 합니다.

또 기하학, 산수, 역사, 지리 등에서도 성취가 높았다고 합니다.

물론 음악에서의 재능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겁니다.

특히 멘델스존의 음악적 천재성은 괴테와의 일화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음악 스승인 프리드리히 첼터(Karl Friedrich Zelter)는 문학가 괴테와 절친사이였습니다.

당시 괴테는 독일 문화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열두 살 때 첼터와 함께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에 가게 됩니다.

아마도 첼터는 친구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신동 제자를 자랑하고 싶었을 겁니다.

사실 괴테에게 찾아온 이른바 신동들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일흔이 넘는 거장에게 눈도장 찍고 칭찬이라도 한마디 들으면면 가문의 영광이었을 뿐만아니라

출세의 지름길이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괴테는 아주 깐깐한 노인네여서 칭찬에 인색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괴테마저도 어린 멘델스존에게 완전히 매료됐던 모양입니다.

열두 살의 멘델스존은 괴테의 바이마르 집에서 무척이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멘델스존은 누가 보더라도 감탄할 만큼 준수한 외모를 지닌 아이였다고 합니다.

열두 살 때의 얼굴이 초상화로 남아 있는데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예쁜 생김새라고 합니다.

물론 괴테가 아이의 예쁜 얼굴에 반했을리는 없을 겁니다.

멘델스존은 괴테 앞에서 바흐의 푸가를 비롯해 여러 음악을 연주합니다.

자신이 직접 작곡한 즉흥연주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연주에 대한 괴테의 평가가 놀라울 정도로 극찬입니다.

괴테는 친구인 첼터에게 "당신의 제자는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합니다.

상상 이상의 칭찬이라고 해야겠죠. 괴테의 말을 좀더 보면,

"이 아이가 처음 보는 악보를 앉은 자리에서 연주하고 작곡하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 할 정도군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다는 걸 난 믿지 못했을 걸세.

당신의 제자가 이미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자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 짧은 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사실, 멘델스존의 가문에 대해 괴테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모세는 당대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도 사람들의 인심을

결코 잃지 않았던 은행가였습니다.

말하자면 멘델스존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교양과 학식도 깊은 '뼈대 있는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괴테가 멘델스존을 예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전제였을 겁니다.

게다가 멘델스존은 좋은 집안에서 잘자란 아이답게 구김살이 없었습니다.

당시 괴테의 바이마르 집에서 멘델스존이 자신의 누나 파니(Fanny Mendelssohn)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괴테 선생님"에 대한 어린아이의 친근하고도 순진한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괴테를 즐겁게 했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괴테 선생님'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아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해맑은 소년이었던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난 것은 겨우 서른여덟 살 때였습니다.

사실 그는 요절한 음악가로 인식되고 있는 모차르트보다 겨우 3년을 더 살았을 뿐입니다.

사랑했던 누이 파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멘델스존은 거의 넋이 나가버린 상태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본인도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 남매의 이야기는 음악사에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는데, 외모도 쌍둥이처럼 닮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여느 남매와 달랐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파니가 결혼 직전에 보여줬던 히스테릭한 태도, 남들이 보기엔 연인 간의 사랑싸움처럼 보였다는

남매의 말다툼, 또 두 사람이 평생토록 일심동체로 공유했던 음악에 대한 동지적 태도 같은것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부터 멘델스존의 얼굴은 30대가 무색할 만치 늙어버립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 라이프치히의 예술행정가, 또 교육자로서의 동분서주가 그를 빨리

늙게 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가문의 '율법'에 익숙해 있었고

그것을 평생토록 습관으로 이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는 멘델스존의 삶에서 거의 마지막 시기에 완성된 음악입니다.

1844년 여름에 완성한 것으로 기록돼있는데 이곡을 작곡하는데는 적어도 6년쯤 세월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고 있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는 당시에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는 멘델스존의 절친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그 친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자곡에 관해 의견을 구한 것은 183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에 곡을 완성해 페르디난트 다비트에게 헌정합니다.

이듬해 초연 때의 바이올리니스트도 당연히 그 친구였습니다.

멘델스존이 남긴 음악 가운데 오늘날 연주회장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입니다.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두 음악가를 꼽으면 멘델스존과 슈만이 있습니다.

이 둘은 친구사이로 소위 절친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이 1809년생, 슈만이 1810년생으로 나이도 거의 비슷했습니다.

슈만은 작곡가 뿐만 아니라 음악비평가로도 활약이 대단했는데, 그는 '다비드 동맹'이라는

가상의 단체를 설정해 놓고 그 단체의 회원들이 토론을 펼치는 방식으로 음악비평을 쓰곤했습니다.

그런데 슈만이 그 비평속에서 '음악적 동지'로 묘하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멘델스존입니다.

이처럼 슈만은 멘델스존을 아주 신뢰했습니다.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을 초연했던 지휘자도 바로 멘델스존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은 낭만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당대의 지휘자이기도 했습니다.

지휘봉을 처음 쓰기 시작한 지휘자 가운데 한 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휘자의 역할이 단지 음악의 박자를 지시하는 것에서 음악을 해석하는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멘델스존은 그렇게 '음악 해석자로서의 지휘자' 라는 변화를 이끌어낸 선구자였습니다.

즉 지휘자의 위상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는데, 슈만은 1839년에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C장조 '그레이트'>의 악보를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발견했는데

그 악보를 곧바로 친구인 멘델스존에게 보냅니다.

그래서 이 곡은 1839년 3월21일에 멘델스존의 지휘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됩니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이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슈만과 멘델스존에 의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깊었습니다.

멘델스존은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을 교수로 초빙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멘델스존의 음악 중에서도 '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곡이 있습니다.

바로 <봄의 노래>라는 피아노곡입니다.

슈만의 <봄>은 규모가 큰 교향곡이지만, 멘델스존은 아주 소담한 규모의 피아노곡으로 <봄>을

노래해 남겼습니다. 음악의 분위기도 슈만의 <봄>과 많이 다릅니다.

슈만의 <봄>이 아직은 춥고 불길한 바람이 부는 봄이라면, 멘델스존의 <봄>은 그야말로

따스한 봄날이었습니다.

산들바람이 기분좋게 불어오는 창가에서 봄 향기에 취해보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렘과 동경, 약간의 몽롱함까지 담겨있습니다.

멘델스존은 스무 살이 되던 1829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던 1845년까지 모두 8권 48곡으로

이뤄진 피아노소품집을 썼습니다. 마지막에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곡이 하나 더 포함돼 있어서

49곡으로 셈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1권부터 6권까지는 그의 생전에 또 7,8권은 세상을 떠난 뒤에 출판됐는데, 전곡을 통틀어

<무언가>(Lieder ohne Worte)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무언가>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또 봄날의 음악으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곡인

<봄의 노래>는 5권의 여섯 번째 곡으로 수록돼 있습니다.

<무언가>는 말 그대로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무언가>는 연주시간 5분 미만의

짤막한 피아노곡들을 모아놓은 소품집인데,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이뤄진 가곡풍의 음악입니다.

멘델스존이 이런 음악을 자그마치 16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작곡한 이면엔 시대적 필연이 존재합니다.

슈베르트에서 슈만과 멘델스존으로 이어진 독일 낭만주의에서 '가곡'은 매우 중요한 장르였습니다.

낭만주의의 본령은 '문학과 음악의 만남'이었고, 가곡이야말로 그런 음악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르였죠. 그래서 멘델스존도 '가사없는 노래'에 긴 시간 마음을 쏟았을 겁니다.

아울러 19세기는 그야말로 피아노의 시대였습니다. 악기의 개량과 진보가 눈부시기 이뤄지면서

수많은 피아노 걸작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모차르트의 거의 마지막 시기, 베토벤 중기 이후부터라 할수 있죠. 피아노의 표현력이 놀라울치 만큼

확장된 시대였습니다. 슈만, 멘델스존과 동시대 음악가였던 쇼팽의 피아노 음악,

리스트의 신기에 가까운 연주도 다 이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그런 지점들이야말로 멘델스존이

피아노 한대로 노래하는 가곡집인 <무언가>를 작곡한 배경이었던 셈입니다.

멘델스존의 <무언가>는 당시에 대단한 히트곡이었습니다.

개량된 피아노가 한창 보급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부르주아들이 너도 나도 거실 한가운데에

피아노를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의 좀 산다 하는 집의 거실 피아노 위에는 <무언가>악보가 놓여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가곡풍의 선율, 게다가 테크닉적으로도 연주하기 어렵지 않은 곡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1847년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멘델스존의 모든 음악에 대한 극렬한 폄훼가 시작된 것은 1850년에 바그너가 '음악에서의 유대정신'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라고 할수 있습니다.

멘델스존은 유대인이었죠.

바그너가 그 논문으로 멘델스존을 공격했던 시기부터 거의 100여년에 걸쳐 이른바 '멘델스존 죽이기'가

진행됩니다. 심지어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시기에는 독일 음악사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치부되기까지 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언급했듯, 생전의 멘델스존은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천재로 평가받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악보를 고치고 또 고치는 스타일로 작곡을 했습니다.

그렇게 창작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는 서른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음악 인생 거의 전부를 바쳐 작곡한 <무언가>는 혼자있는 시간에 듣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봄의노래>외에도 <사냥의 노래>,<베네치아의 뱃노래>,<이중창>,<실 잣는 노래>등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천재들은 상당수가 짧은 생애를 살다간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멘델스존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삶 속에서도 수많은 명곡을 남겨서 온 인류가 큰 혜택을 보고 있습니다.

음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천재들이 남긴 음악을 듣고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는걸 보면 음악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큰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가치있게 사느냐'가 문제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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