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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브람스의 음악세계

돌아온아톰 2017. 4. 28. 12:51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의 아버지인 요한 야코프 브람스(Johann Jakob Brahms)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습니다. 브람스의 가정은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이곳저곳 떠돌며 작은 악단의 연주자로 살다 스무 살 무렵에 독일 함부르크에 정착합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려주는 번듯한 오케스트라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동네잔치에 불려가 경음악이나 연주하는 별 볼 일 없는 악사로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브람스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30년, 세 들어 살던 집 주인 딸과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집도 형편이 곤궁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브람스의 어머니인 크리스티아네 니센(Christiane Nissen)이

남편보다 17년 연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브람스가 14년 연상의 클라라를 평생토록 사모한 배경에는 그런 가족사도 깔려 있는 듯합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브람스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열두 살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극장에서 가수들의 반주를 해준다거나 인형극의 배경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주고 급료를 받았습니다. 밤에는 술집에서 연주를 했습니다.

함부르크는 항구도시인데 어린 브람스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술집은 취한 선원들로 북적거렸고

매매춘이 일상사였습니다.

그 어둡고 음습한 북부 독일의 항구도시에서 브람스는 우울하고 가난한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래서인지 훗날 그가 작곡한 음악들은 대부분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입니다.

1853년은 브람스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해였습니다.

나아가 서양음악사에서도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해였습니다.

그해 9월30일, 드디어 브람스가 슈만과 만나게 됩니다. 브람스는 스무 살 청년이었고 슈만은 마흔세 살의

중년이었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무명의 음악가 지망생에 불과했지만 슈만은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잡지 '음악신보'의 발행인이었습니다.

스무 살 청년은 자신이 직접 쓴 <피아노 소나타 C장조>를 대선배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악장이 끝났을때 슈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잠깐 연주를 멈추게" 라고 말합니다.

연주가 시원치 않았던 걸까요? 아니,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슈만은 서둘러 아내 클라라를 거실로 불러들입니다.  아내가 들어오자 슈만이 청년에게 말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주게나"

그날 슈만의 집 거실에서 펼쳐졌던 장면은 매우 드라마틱합니다.

슈만과 클라라는 청년 브람스의 연주에 감탄합니다.

슈만은 그날 일기에 "천재가 다녀갔다" 라고 씁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간한 잡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글을 게재합니다.

그것은 슈만이  이 잡지에 절필을 선언한 후 10년 만에 쓴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브람스에 대한 극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극찬의 평가는 브람스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린 계기였던 동시에 '브람스의 적'을

만든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슈만의 글이 너무 신랄했던 까닭입니다.

슈만은 브람스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당시의 음악적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던 리스트와 바그너 풍의

음악을 거세게 비난합니다. 그 덕분에 훗날 브람스는 반대파들의 공격에 직면합니다.

세상일이란게 좋은 게 있으면 힘든 것도 있는 게 다반사인 것 같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는 청년 브람스의 대표작입니다.

브람스가 남긴 4곡의 협주곡들 그러니까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 중에서 가장 먼저 작곡된 음악입니다.

브람스가 최초로 작곡한 대규모 관현악곡이기도 합니다.

브람스를 열렬히 옹호햇던 슈만에게는 일종의 조울증이 있었습니다.

그는 브람스를 첫 대면하고 약 5개월뒤에 라인강에 몸을 던집니다.

간신히 구조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브람스는 슈만이 사망하기까지 약 2년간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슈만의 집안을 가족처럼 돌봅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바로 이 무렵에 작곡됩니다. 작곡이 완전히 마무리된 시기는

1858년인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브람스는 서른두 살 때였던 1865년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때 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음악가로서 서서히 자리르 잡아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모친위독' 이라는 전보를 받고는 황급히 고향 함부르크로 달려갔지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브람스의 어린 시절은 고달팠습니다.

무능력한 가장이었던 아버지 나이가 많은데다 장애인이기까지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천근만근 삶을 옥죄어왔던 가난이야말로  브람스가 보낸 유소년기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브람스는 10대 초반부터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며 아르바이트 연주를 해야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브람스의 성품을 이해할 수있는 단초 가운데 하나일겁니다.

유소년기의 체험은 한 인간의 구조를 이루는 기초공사와도 같습니다.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끈질기게 힘을 발휘합니다.

브람스 음악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깊은 침잠의 이면에 어린시절부터 형성된 내면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유추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가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렇습니다. 클라라를 향한 연모 때문에 독신을 고집했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보다는 해소될길 없는 가난 그로 인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두 사람은 결국 별거하게됨)를

목격해야 했던 브람스의 기질적 선택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브람스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한(恨)이 깊었을 겁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빈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술도 많이 마셨을 겁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슬픔에 빠져 있던 브람스가 같은해 4월에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악보하나를 꺼냅니다.

바로 <독일 레퀴엠 op.45>의 출발점입니다.

브람스가 꺼내든 것은 스승이자 선배였던 슈만이 세상을 떠난 1856년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미완성 악보 <독일레퀴엠>이었습니다.

미완성이라고 해봤자 사실상 운만 띄워 놓은 악보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독일레퀴엠>은 모두 7곡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브람스가 꺼냈던 악보는 제2곡만 작곡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브람스가 슈만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독일레퀴엠>을 썼다는 얘기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보다 분명한 사실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브람스가 이 곡의 작업을 재개했다는 점입니다.

브람스는 이듬해에 모두 6곡으로 이뤄진 <독일레퀴엠>을 작곡해 1867년에 그중 세 곡을,

1868년에 여섯 곡을 모두 초연합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브람스는 한 곡을 더 작곡합니다.

여섯 곡의 초연을  끝낸 다음에 첨가했던 곡이 바로 제5곡입니다.

소프라노 독창이 전면에 나서고 합창이 은근하게 뒤를 받치는 <독일레퀴엠>중에서도 가장 온화하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적어도 이 곡에 대해서만큼은 "브람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특히 '이사야' 66장 13절을 가사로 삼고있는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라는 대목에 이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브람스와 만년에 가깝게 지낸 친구였습니다.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책에서 한슬리크가 브람스를 어떻게 평했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슬리크는 브람스의 작품이 갖고 있는 밀도 높은, 지적인 작품성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브람스가 슈만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한슬리크는 브람스가 자신에게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왈츠 op.39>를 헌정하자 매우 기분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착실하고 과묵한 브람스, 순수한 슈만의 제자, 북독일풍의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

프로테스탄트, 슈만처럼 비세속적인 사나이"

한슬리크는 슈만과 브람스로 이어지는 "가장 내밀한 세계로 침잠하는 음악의 세계"를 옹호했던

대표적인 비평가입니다. 반면에 독일 낭만주의의 또 하나의 흐름인 바그너풍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판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한슬리크가 브람스 음악의 요체로 평가했던 '내면으로의 침잠'을 <독일레퀴엠>만큼

잘 보여주는 음악도 드뭅니다.

애초에 레퀴엠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에서 연주되는 교회용 음악인데 가사는 대개 라틴어입니다.

하지만 브람스의 <독일레퀴엠>은 연주회용으로 작곡됐고 가사도 독일어로 이뤄져 있습니다.

구상에서 완성까지 거의 10년이 걸렸고, 어머니의 죽음이 전곡을 완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염두해야할 일입니다.

음악은 소프라노와 바리톤의 독창, 혼성4부 합창, 관현악 반주로 이뤄져 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노랫말입니다.

이곡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가사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브람스는 흔히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독일음악의 3B'로 일컬어집니다.

바흐, 베토벤과 더불어 브람스를 독일 정통주의의 계보로 한데 묶으려는 시도가 브람스 생전이었던

19세기 중후반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브람스의 음악에서는 바흐나 베토벤이 종종 보여줬던 유머나 익살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브람스 스스로도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듯이 그의 음악은 침울하고 내향적입니다.

베토벤에 비하자면 보다 선율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면서 그 선율 속에는 슬라브적이고 집시적인

감성이 아련하게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때로 헝가리풍의 흙냄새 나는 리듬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그 모든 것들을 '엄격한 독일적 형식' 속으로 정리합니다.

그렇게 고전적 형식미를 포기하지 않았던 태도 때문에 브람스에게 '3B'라는 호칭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고전주의를 지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교향곡 1번>과 관련해 전해지는 브람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친구였던 지휘자 헤르만 레비에게 했던 말인데, 좀 더 인용해 보면,

"이런 거인이 뒤에서 뚜벅뚜벅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느껴야하는 기분이

어떨지 당신은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거인은 바로 베토벤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은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베토벤이라는 앞 시대의 거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베토벤이 남긴 위대한 교향곡들에 필적할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대한 토로인 셈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베토벤을 의식했던 음악가는 브람스만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의 현자(賢者) 바흐는 1750년 타계 이후에 음악이 거의 연주되지 않는 '잊혀진 작곡가'의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베토벤의 경우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베토벤은 1827년 세상을 떠난 이우에도 여전히 가장 많이 연주되는 죽은 작곡가였습니다.

19세기 내내 그랬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베를리오즈, 바그너, 브람스 등 이후의 수많은 중요 음악가들이

베토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직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브람스의 경우는 베토벤에 대한 존경심이 유난했고 베토벤의 음악적 성과를 의식하는 정도가 다른이들보다 훨씬 강했던 것 같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실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그 아담한 공간에는 창밖을 향해 피아노가 놓여 있고 그 왼쪽 벽에 베토벤의

커다란 흉상이 걸려 있습니다.

물론 그밖에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모 복제화와 비스마르크의 초상화 등도 걸려 있지만

베토벤의 흉상은 유난히 높은 곳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작곡하는 브람스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브람스는 애초부터 소심한 성격, 좋게 말해 신중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울러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선배 음악가 슈만 덕분에 그런 성격이 한층 심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슈만은 잡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으로 브람스에 대한 극찬을 게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브람스에게 영광이었던 동시에 두려움이 었으며 앞으로의 험로를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슈만은 그 글에서 브람스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리스트와 바그너 풍의 음악을 거세게 비난했기에

브람스는 데뷔와 동시에 반대파들의 공격타깃이 됩니다.

바그너가 그를 공격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그너를 숭배했던 작곡가 휴고 볼프는 브람스의

교향곡을 일컬어 "구역질 나도록 고리타분한 거짓말"이라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내향적인 브람스는 자신을 향한 공격에 일일이 대응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남들 말에 전혀 신경을 안쓰는 자유롭고 호방한 성품의 소유자였던것도 아닙니다.

남에게 비난을 들으면서 또 그것때문에 내면적으로 스트레스를 적잖이 받으면서도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묵묵히 버티는 사람 브람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베토벤을 의식했던 브람스, 게다가 반대파들로 인해 음악적으로 더욱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던 그는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고하는데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야말로 갈고 닦으면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면서 작곡에 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람스는 참으로 속 깊은 애정과 배려를 지니고 타인을 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감도 아주 강했습니다.

브람스의 아버지는 아내(브람스의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몇 달 후에 자신보다 나이가

18세 연하였던 여성과 재혼하는데요 그녀에게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브람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 어린 동생은 매우 병약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리남' 브람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1872년부터 새어머니와 병든 동생을 자신이

직접 돌봅니다.

자신의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슈만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을 돌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람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격, 수수께끼와 같은 복잡한 캐릭터를 지니기도 했지만

인내와 성실함 그리고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짐작컨대 브람스는 그런 성품 때문에 상처와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겁니다.

아마 그런 성품과 기질이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내향적 우울함과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운

어두운 심연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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