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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벽두를 장식했던 최고의 발라드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울증을 간신히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쓰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901년 5월

모스크바에서 비공식 초연합니다.

비공식 이란 콘서트홀의 청중 앞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교인

모스크바음악원 관계자들과 동료 피아니스트들만 초대해 연주회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식초연은 11월 9일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졌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3년간의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부터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1918년까지 그는 작곡가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줬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 다시말해 '사회적 자존감'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 올리고 있느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발라드'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곡으로 재기에 성공해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더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힌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때문에 혁명직후 러시아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10월혁명이 발발하고 3주후 스웨덴으로부터 연주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탑니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연주를 마친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 192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잠시 체류하다가 193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부터 45세의 나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연주에 가까웠다고봐야합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의 그는 자작곡 뿐만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이유로 미국 망명후 세상을 떠날때까지 그가 완성한 곡은 고작 6곡에 불과합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는 그렇게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뉩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cm에 달했다는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습니다.

비버리힐즈에 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더심각한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였을 겁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렇게 살다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가운데서도 오늘날 가장많이 연주되는

걸작입니다.

1악장은 모데라토(보통 빠르기로), 묵직하고 장중한 피아노 독주로 문을 엽니다.

이어서 관현악이 첫 번째 주제를 제시합니다.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은 가요적 선율이

뭉클하게 밀려옵니다.

그리고 잠시후 피아노가 센티멘털하고 감미로운 두 번째 주제를 노래합니다.

2악장은 아디지오 소스테누토 느린 템포로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서 묵직하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현악기와 클라리넷 호른과 파곳이 어울려 연주하는 반음계적 서주가 아주 서늘합니다.

특히 이 두 번째 악장에는 미국의 팝가수 에릭 카멘이 노래했던 <All by Myself>의 오리지널

선율이 등장합니다.

마지막 3악장은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앞의 두 악장에 비해 활달하고 힘이 넘칩니다.

현을 중심으로 약간 유머러스한 악상이 펼쳐지면서 시작합니다.

마지막 악장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피아노 테크닉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깝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깊어가는 밤의 정취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음악도 드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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